2018년 시민위원310 첫 모임 <3·1운동은 생일이다>

2019년 삼일절은 우리 민족사의 거대한 생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게 될까요?

누군가는 TV를 보며 삼일절 기념식을 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새 학기 준비를 하고 있겠지요.

또 누군가는 서울광장의 주인공이 되어 3·1운동 축제에 함께 하고 있을 것입니다.

 

2018년 6월 16일

더 커진 시민위원310으로 우리는 만났습니다.

내가 상상하는 ‘대한민국 100주년’을 현실로 바꾸기위한 첫 행동에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첫 모임인만큼 등록카드 작성으로 행사 시작 전부터 분주하였습니다.

시민위원310에 활동 신청을 하시면 ‘예비시민위원’이시며

행사나 답사에 1회 참석을 하시어 현장등록을 하시면 시민위원310 위원 자격으로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이날 참석하지 못하신 예비시민위원분들은 다음 행사들에 꼭 참석하시어 현장 등록을 진행해주시면 됩니다.

현장등록 진행과 안내는 시민위원 1기분들이 봉사해주셔서 더 의미가 컸습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모임에 참석해주신 분들에게는 작지만 특별한 기념품을 나눠드렸습니다.

바로 ‘100년 배지’와 ‘100년 씨앗’입니다.

100년 배지는 독립운동 당시 사용되었던 대한독립만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7호)를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대한독립만세 태극기를 휘날리며 달려나갔던 독립운동가처럼

시민위원310 가슴에도 꼭 배지가 달려있었음 좋겠습니다.

 

100년 씨앗은 우리밀씨앗 키트입니다.

우리밀은 혹한의 겨울을 지나 이듬해봄 농약을 치지 않아도 쑥쑥 자랍니다.

우리 역사 또한 겨울 속에서 3월의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그리고 우리 스스로 민주공화정을 탄생시키기까지 푸르른 밀밭의 생명력과 3·1운동은 많이 닮아있기에

100년 씨앗이라는 이름으로 나눠드렸습니다.

 

 

개그우먼 조승희씨의 사회로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독립운동 테마역사 안국역 이후 또 만나는 얼굴이라 많은 시민위원분들이 반가워하셨습니다.

시민위원310의 첫 모임을 기념하기 위한 공연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국전통무용수 2인의 칼춤은 3·1운동이 일제의 압제를 잘라내고 봉건시대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첫 모임 환영사는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이종찬 위원장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며칠 전 독립기념관에 방문하여 독립선언서 원본을 보고 오신 이종찬 위원장님은

일본경찰 감시를 피해 급하게 인쇄하느라 ‘조선’이 ‘선조’로 뒤바뀐 일화를 설명하시며 시민위원의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3·1운동은 ○○이다!’

첫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시민위원310이 보내주신 100년 메시지 소개입니다.

‘3·1운동은 대한민국이다’ 부터 시작해서 ‘3·1운동은다이어트다’까지 천차만별의 이유로 빈칸을 작성해주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100년 메시지를 썼는지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하였습니다.

3·1운동은 복면가왕이다!
한번 보면 멈추지 못하고 빠져드는 예능 복면가왕처럼 3·1운동 역시 우리 민족에게 절대적 운명같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3·1운동은 네비게이션이다!
목표지점을 정하고 계속 달려가기 위해 사용하는 네비게이션처럼 3·1운동도 우리 국민이 기본으로 알아야하며 100주년을 향해 계속 달려나가야 한다.

3·1운동은 폭포수다!
큰 물이 모이고 모여 한꺼번에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3·1운동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독립을 향한 열망이 폭포수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100년 메시지는 시민위원310을 시작으로 사회 각계 전문가와 일반 시민으로 확장하여 모을 예정입니다.

더불어 시민위원310이 보내준 100년 메시지 모두는 따로 소개해드릴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시민위원310의 역할이 3·1운동 100주년을 알리고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기에 3·1운동을 비롯한 우리 독립사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총감독은 이날 강연을 통해 서울시가 어떤 개념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는지,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이며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은 무엇이 있는지 설명하였습니다.

 

앞으로 강연 2번, 낭독회+답사 3번, 시민토론캠프 등 다양한 활동이 시민위원310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 역사에 대한 일방적인 주입이 아닌 독립운동을 현재화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된 프로그램들입니다.

시민위원310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3·1운동과 우리 독립역사에 대한 배움, 확장, 애정 등 긍정적인 변화들이 생기길 바랍니다.

 

시민위원310은 무엇이고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시민위원310 단장이자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김용만 단장이 설명해주었습니다.

시민위원310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의 홍보대사입니다.

시민위원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언행을 보여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3·1운동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이 만세운동의 100년을 준비하고 기념해야 할까요?

단순히 ‘100’이라는 큰 숫자 때문일까요?

 

올해 시민위원310이 2배 이상 커졌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나갈 생각에 벌써부터 두근댑니다.

우리는 3·1운동이, 독립운동이 교과서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일상이기를 바랍니다.

꼭 엄숙하고 무겁지 않아도 됩니다.

재치있는 아이디어로, 쉬운 접근으로 3·1운동을 알리고 애정해주세요.

첫 모임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시민위원310 2017년 활동보고회

숨가쁘게 달려온 2017년도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시작이 반이다’라면 나머지 반은 마무리겠죠?
시민위원310도 1년 여 간의 활동을 매듭짓기 위해 평일 저녁 국회의사당으로 모였습니다.

C-47 비행기에서 첫모임을 가졌던 33인 청소년위원들도 이곳으로 이동하여 활동보고회까지 함께했습니다.

시민위원의 활동을 축하하기 위해 우당 이회영 선생의 후손인 이종걸 의원님과 서울시 33이신 정동환 선생이 자리해주었습니다.

이종걸 의원님은 C-47 비행기 행사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해주시고 정동환 선생 역시 818광복콘서트 사회와 백범일지 낭독회 참여 등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계시는 33인 중 한분이십니다.

이날도 이종걸 의원님은 시민의 힘에 대해 힘주어 말씀하시고 정동환 선생은 우당 이회영 역할을 맡게 되기까지 ‘운명’이라 말할 수 밖에 없는 사연들을 늘어놓으며 시민위원310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제는 능숙하게 사회를 보는 김용만 시민위원310 단장의 진행으로 초반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시민위원의 한 해 행사들과 활동을 정리하는 영상을 보고 있으니 모두들 추억에 잠긴듯 하였습니다.

무더운 날 야외행사도 갑작스러운 소낙비에도 시민위원310은 웃는 얼굴로 적극참여하였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참여였기에 매 순간 즐겁고 의미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날의 중요한 순서는 시민위원이 직접 제안하는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사업아이디어였습니다.
1년간 강의를 듣고 활동하며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고 제안하고 싶은 사업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여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활동 마무리에 상이 빠질 수는 없죠.

열심히 참여해주신 시민위원분들과 정성스런 참여후기를 보내주신 시민위원분을 선정하여 소나무 상패와 3·1운동 만세기를 드렸습니다.

모두모두 적극적으로 활동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시민위원310에게도 위촉장을 수여해드렸습니다.

다가오는 2018년 활발한 활동 기대합니다!

여의도공원 C-47기에서 압록강 행진곡을 불러봤던 33인 청소년위원이 앞장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제는 가사를 보지 않고도 큰 소리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곡입니다.
청소년위원이 불렀기에 더 의미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많이 모여 단체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나요?
‘기억’하자는 의미로 손가락을 ‘ㄱ’으로 만들어보았습니다.
2017년 시민위원310 활동을 기억하고 3·1운동을 기억하자는 의미겠죠?
한해동안 적극적으로 활동해주신 시민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2018년에도 더욱 활발한 활동 기대합니다!

백범일지 초판 발행일 기념과 백범일지 낭독회 – 시민위원 참여후기

 

 

백범 선생께서 머무셨던 새문 봉원사에 함께 하고는

 

 

김경운 시민위원

 

우리, 아니 내게도 신촌에서의 추억,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 불붙던 시절의 생각을 하며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그래도 아직은 안녕한 홍익문고
홍익서점에 눈인사하고 마냥 죽 때리던 복지 다방, 경의선 신촌역, 골목 주점 거리 올라 이대 정문 앞
나비소녀가 되어 버린 할머니께 간만에 인사드리고서는 낙엽이 되어버린 단풍과 은행잎을 밟고서 이대 후문 건너 봉원사길을 올랐다.

 

그때는 단숨에 올랐건만 주변이 너무도 심하게 변해서 산 위의 봉원사가 아니라
촘촘한 주택 위의 절집이 되어버렸다. 쫓기면서도 주유천하 하는 것 같았던
백범 선생께서 공덕리 박태병 진사의 동서인 유완무를 만나고 상객으로 대우받으며
고금의 역사를 담론 하며 한 달 여를 지냈는데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사용키 매우 어려우니
‘김구’라고 개명을 하고 다니기로 했단다. 외자 이름을 가진 문희, 황해 두 배우의 열렬한 어린 팬이었던 나는
백범 선생께서 김창수란 평범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올해 왠지 무척이나 불편했다.
이때에 이 인연을 갖게 된 새 절 태고종의 봉원사는 역사를 가진 고찰이면서도
내가 갖은 종교적 선입견보다는 무척이나 자유로운 곳인 듯싶다.

 

연꽃 문형이 있는 방석 위에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 백범 김구를 들려주시는
한시준 교수님의 말씀과 글 속에서 백범 선생께서는 세계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말과
글을 제시한 이상주의자이셨다”라고 알려주셨다.

 

이상주의자? 건장한 씨름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의 냉철한 기획자. 요즘 말로 “강한 남자”이신데
바로 내가 무언가 결정 못하던, 찾지 못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주 오래전 나라의 국부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라 알려주신 어른들 속에서

“내가 소원하는 나라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무언가 맞지 않았다.
배움이 워낙 짧았던 탓에 미처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삼일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100주년을 두해 앞둔 2017년 올해. 이제 잦아질 모임, 모임, 모임들.
그 모임들에서 내가 살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 무능한 약해 빠져 나라를 뺏겨버린 황제
혹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를 욕하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고 마는 역사를 배운 우리 세대.
그리고 남과 같아진 가족들에 3·1혁명을 이회영 선생님 가족을 알려주려 한다.
이제 99주년 삼일절에는 언제나 그러했던 종로 보신각 타종행사를 함께하고 태화관을 알려주고
태화로를 따라 독립선언서의 길과 대한제국의 길을 알려주려 마음먹는다.

 

처음에는 많이 부끄러웠다. 듣고만 오자, 알고만 오자 하면서도 돌아오는 길은 항상 숙제를 가져오고는 했다.
그 부담은 이제 나의 자산이 되어 나누어 줄 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책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던 총감독님의 말씀에 부끄럼 없이 읽을 수 있었던,
들어주고 응원 보내주신 동료 시민위원 모두와 섬김으로 일러주고 보여준
“젊은 그들”에게 행복케 했던 맘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마 김경운 절 드립니다.

 


 

박중호 시민위원

 

우리 선대 어른들이 살아오셨던 과정과 백범 선생이 사셨던 쓰라린 고통을 겪으면서 살았던 세월이었다.
요즘 우리들처럼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생각한 넓은 마음으로 사신 것이 큰 어른이시다.
백범의 정신을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 가슴에 세기며 살아야겠다.
지금은 제2의 독립이 필요한 시기이다. 우리 국민 개개인의 독립 말이다.

 


 

이재찬 시민위원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17.11.15. 수요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많은 시민위원들과 사찰 스님이 참석한 가운데 백범일지 초판 발행일 기념과 백범일지 낭독회 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는 서해성 총감독의 사회로 단국대 한시준 사학과 교수의 강연에 이어 백범일지 낭독으로 진행되었다.

  1.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 백범 김구

한시준 교수는 이날 강연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은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 임을 역사적 사실(史實)에 입각하여 역설하였다. 동아시아의 한·중·일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을 살펴보면 중국은 공자 외에 진시황, 손문, 장개석, 모택동 등이며,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은 세종대왕, 이황, 이이, 신사임당, 이순신 장군 등을 거명한다. 그런데 ‘한국인으로 세계에 알려진 인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나라로서 그 위상이 달라진 만큼 우리의 역사를 세계에 알려야 할 시대적 필요성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 속에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한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고, 인류에 공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평등·행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19C ~ 20C에 세계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투쟁을 전개하였던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세계 전 민족의 약 80%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독립운동이란 우선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고, 다음 인간의 자유·평등·행복을 지키기 위함이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치민, 프랑스의 드골, 필리핀의 호세 리잘, 이집트의 아라비 파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자국민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통한(痛恨)의 독립운동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세계적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을 찾는다면 누구인가? 국내외적으로 가장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인물은 백범 김구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중국, 대만을 비롯,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중국과 대만에는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처럼 부각되어 있다. 중국 국민당과의 한중 대일 공동 항전의 지도자로 이해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지난해 중국의 대일 항전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김구의 행적을 다큐 제작과 2회에 걸쳐 방송을 하였다. 중국은 역사다큐를 제작하는 데 있어 중앙정부의 영향이 크게 미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인식이 한국보다 크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된 기념관이 없지만(독립기념관, 백범 김구 기념관 등이 있다), 중국 상해, 항조우, 충칭 등 9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들이 세워져 있다. 또한 임시정부를 이해하는 차원이 다르다. 중국 정부나 중국인들은 상해의 임시정부 청사를 대한민국의 탄생지로 여기고 있고, 한국에서도 그렇게 여기는 줄로 알고 있다. 임시정부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김구를 이해하는 차원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김구를 ‘독립운동 원훈(元勳)’, 또는 ‘한국 국부(韓國國父)’라고 일컫기도 한다. 김구는 이미 중국에 널리 알려져 있고,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가 영어·중국어·일본어·독일어·러시아어·몽골어 등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것은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구는 자주독립 외에 세계평화를 궁극적으로 지향하였다. ‘나의 소원’에서 밝힌 그의 목표는 ‘자주독립국가’, ‘자유국가’, ‘문화국가’ 건설이었다. 김구는 세계평화에 대한 꿈과 실현방안을 제시한 지도자였다. 일제를 상대로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주의 입장에서 보면 무모하고 어리석다 할 것이다. 김구도 이를 모르진 않았다. 그렇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바위는 부서졌다. 김구가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세계평화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민족도 해본 일이 없으니 공상이라 하겠지만, 우리 민족이 나서서 해보자”라고 하였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상가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세계평화를 목표로 삼고, 그 방안을 제시한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1. 백범일지 낭독

김구 선생(법명 원종)과 봉원사와의 인연을 보면, 1899년 일본 장교 살해사건으로 투옥 중 탈옥하고서 서울 서문 밖 새절(지금 봉원사)에 피신했으며 사형(師兄) 혜정(慧定) 스님과 동행해서 평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해우했다. 그 후1948년 봉원사를 다시 방문하였다. 인연이 깊은 봉원사에서 백범일지 초판 발행일을 기념하는 낭독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1928년부터 쓰기 시작한 ‘백범일지’는 일제 침략이 심해지고, 독립의 희망이 점차 약해지면서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 형식으로 집필한 것이다.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담아냈는데 상권과 하권, ‘나의 소원’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1929년, 아들들에게 편지로 전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구한말 당시의 과거사로 ‘우리 집과 내 어린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은 그의 독립운동 기록으로 ‘3.1 운동의 상해’, ‘기적 장강 만리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 ‘정치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상하이 임시 정부 청사에서, 하권은 1942년에 충칭 시에서 각각 쓰였고 상, 하권과 ‘나의 소원’을 합친 판본이 1947년 12월 15일에 국사원(國士院)에서 출간되었다. 현재 백범기념관에서 소장 중이다. ‘백범일지’는 1997년 6월 12일,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백범일지 개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가난과 양반들의 횡포를 경험했기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대적 교육사업과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그의 나이 38세에 한일합방으로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 자를 구(九)로 바꾸고, 백정, 범부들(평범한 사람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백범(白凡)이라는 호를 썼다. 3·1운동 후에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원하였고, 광복군 창설 등 항일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에 돌아온 그는 남북 분단을 우려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힘쓰다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경교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효과적인 투쟁의 방법으로 불가피하게 폭력의 수단을 동원한 것일 뿐이며, 오히려 참으로 진실된 인간적인 사랑과 자비를 몸소 실천하였다. 해방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일과 정치꾼들의 음모에 의해 운명하여 장례행렬에 백만 인파가 따랐던 사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것을 보면, 선생은 진정 이 나라의 영원한 지도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시민위원310]백범일지 초판 발행일 기념과 백범일지 낭독회

백범 선생 서거일부터 탄생일을 거쳐 백범일지 초판 발행일까지
총 3번에 걸친 백범일지 낭독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낭독을 위해 모였던 장소들도 항상 의미가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 묘역에서 시작하여 청년백범이 머물렀던 마곡사를 거쳐 봉원사까지.

11월 15일
2017년 마지막 백범일지 낭독을 위해 시민위원이 다시 모였습니다.


이날 낭독회에는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가 함께 해주셨습니다.
항일운동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중점으로 오랫동안 연구를 진행하시고 계신 분이라 여느때보다 풍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낭독회가 열린 봉원사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백범 선생께서 치하포 사건 이후 몸을 피신하였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혜정 스님과 함께 평양으로 발걸음을 함께 하기도 했었습니다.

마지막 낭독회인만큼 이제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입니다.

김구 선생의 평양 기행부터 결혼까지 이야기가 담긴 대목을 읽었습니다.
낭독회 한번에 최소 40명 참석, 2시간 진행, 3회에 걸친 진행.
240시간을 소리내어 백범일지를 낭독한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낭독회를 마치고 다함께 봉원사를 둘러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신라 말기에 지어진 역사가 깊은 사찰답게 의미있고 역사적 가치를 갖고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이런 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던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함께 단풍진 봉원사를 걸으며 청년 백범이 되어보기도 하고 동자승이 되어보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 백범일지 낭독회였던만큼 뜻 깊기도 하고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3·1운동 100주년 2017년도 사업도 마무리되어가지만 더 새로운 사업과 뜻있는 프로그램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함께 ‘가갸거겨’ 외쳐주신 시민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00년 학교 시리즈 강연 ③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정명을 찾는다” – 시민위원참여후기

 

正名을 찾아야 한다

 

최다연

 

역사에서 이름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름 안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가치와 의의, 당시의 사화상 등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 역사 안에 많은 사건들은 “正名”을 찾아왔다.
하지만 유독 ‘3·1 운동’은 그 가치가 폄하된 상태로 이어져 왔다.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몇 전년 팟캐스트 방송이나 학술 심포지엄 등으로
접한 경험이 있었다. 그 당시에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터라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3·1혁명은 중국 신해혁명, 러시아 혁명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를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선언했고,
봉건왕조를 거부하고 민주공화정을 주창했다.
또 여성이 역사 현장에 주체적으로 등장하였다. 어린 소녀, 기생 등 나이와 신분, 세대를 넘어선 등장이었다.
당시 여성의 교육수준을 보더라도 적지 않은 수의 여성이 참여한 사건이었다.
또 전근대적 신민(臣民) 의식이 근대적인 시민(市民) 의식으로 전환되었다.
엄혹하고 거대한 흐름의 줄기를 우리의 힘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이 아니라 ‘혁명’ 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왜 가치중립적인 ‘운동’이라 부르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신해혁명 등 다른 나라의 역사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혁명’이라는 용어가 왜 우리 역사에는 이토록 인색한 것일까?

 

오리엔탈리즘이 떠올랐다. 오리엔탈리즘은 ‘주체’인 서양에 의해 ‘타자’인 동양을 지배하고
관찰, 탐구, 정의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구의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자민족 중심주의 등과 결부되어
서양과 동양은 문명-야만, 합리-불합리, 선진-후진 등 이항대립적으로 체계화되고 재생산 되어왔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3국은 서양 세력에 대해 처음에는 쇄국정책을 통해 대항했지만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
한국은 동도서기(東道西器),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로 선별적인 수용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홀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자부하게 되고
서양의 제국주의적 시점과 동일한 시점을 갖게 되면서 점차 ‘동양’을 타자화하는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어나갔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탈아론(脫亞論)」에서 아시아의 근대화 능력이 없는 ‘야만국’과의 절연을 강조하여
서구 열강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자신을 분리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우리 안에 내면화되었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역사에 ‘혁명’을 입히지 못하는 원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식민이라는 시련을 겪었으나 자발적인 연대와 저항의 힘을 생산해온 역사적 경험이 있다.
가장 최근에는 촛불 혁명으로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저력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더 이상 ‘타자’로서의 동양이 아닌 ‘주체’로서의 동아시아가 되어 우리 역사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억압되고 왜곡된 역사를 대항하는 역사로서 바로잡아 가야 한다.
‘정명찾기’는 그 일환으로 매우 중요한 발걸음이라 생각한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청산하여 ‘운동’을 버리고 ‘혁명’을 되찾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백 살이 되는 해 2019년. 2019년 3월 1일에는 3·1혁명 내지 3·1독립혁명, 기미독립혁명절로서의 정명을 찾기를 기대해 본다.

 

 


 

 

 

박중호

 

강의 제목만 듣고 보고는 어려웠으나 힌트를 듣고 나니 답이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다.
아주 큰 답을 원하는 아주 짧은 힌트였다.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하고 참여해서 큰답을 내도록 해야 할 몫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아무리 맛있고 많은 먹을거리라도 내손으로 먹어야 한다.
나는 먹을거리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되도록 해야겠다 고 생각하며 강의를 잘 들었다.
자리를 마련하고 강의를 해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정윤재

 

1919.3.1 운동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역사에 길이길이 빛날 ‘대혁명'(Great Revolution)이다.

입법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국민의 참여의식을 고취시켜서 서명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첫째, 먼저 시민위원 전체가 서명하고 시민위원 1인 당 100명 씩 서명 배당(몫)을 하여 목록을 작성하여서 가족, 친척, 동료, 주변 그 누구에게나 역사의 중요성을 홍보·취지를 설명하고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둘째, 전체 시민위원이 서명 날인한 것과 배당한 서명 날인 받은것을 종합하여 토대로 하고 그것을 근거로 전체 시민위원이 참석하여서 ‘로상'(거리)서명 국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최소한 : 10,000명~ 그 이상으로 국민의 참여를 해야 한다.

#’행주산성’의 역사를아십니까?

배고프고 굶주린 그 시절. 주린 배를움켜쥐고 아낙네들이 행주치마(명주치마)에 돌과 자갈을담아 인산인해를 이루어 참여했던 대 국민의 역사 우리는 역사의 교훈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위원들이 참여하여 강의듣는그 순간에는 나름대로의 뜨거운 심정, 열정을 가졌다가 문 열고나가는 순간 흐지부지하는 말만하고 행동이 없는참여의식은 버려야한다.

<시민위원 310>위원은 역사에 자긍심과 다음세대에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는 역사의 증인이다.

100년 학교 시리즈 강연 ③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정명을 찾는다”

백성이 시민이 되었고
왕토가 국토가 되었고
봉건시대가 공화정이 되었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200만 명의 사람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약 100여 년 전 대한민국 땅 위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유럽사회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쉽게 ‘혁명’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을 겁니다.
3·1운동 혹은 3·1혁명, 제대로 된 이름을 찾기 위해 11월 2일 시민위원들이 모였습니다.

 

 

새롭게 시민위원에 등록하신 분도 계시고 출석체크를 하시는 시민위원들로
행사 전에는 언제나 분주합니다.

 

오늘의 강연자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님이십니다.
서울시 33인이시기도 하죠.
수많은 저서로 유명하시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민주주의와 올바른 역사 세우기에 힘쓰신 분으로도 널리 알려진 분이십니다.

 

 

 

김삼웅 선생님의 번복없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묵직한 역사책을 한줄 한줄 읽어내려가는 것처럼
매 순간마다 중요하고 의미있는 주장과 지식이 나열되었습니다.

 

 

 

이날 강연에는 특별히 33인 청소년위원도 참석하여 더욱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시민위원310과는 별개로 서울시 중·고등학교 학생 33명으로 구성된 청소년위원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을 모니터링하고 관련 아이디어를 내는 등 주도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시민위원의 다양한 질문으로 강연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사람에게도 이름이 분명한 것이 중요한데,
나라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정작 해외 특히 중국에서는 우리의 3·1운동은 혁명으로 칭송받고 높은 가치고 평가받았는데
우리는 지나친 가치중립적 태도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 강연이었습니다.

2017년 마지막 강연이었던 100년 학교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정명을 찾는다’
강연에 참석해주신 시민위원 어려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00년 답사 세 번째 길 –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 시민위원 후기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에서 아관파천의 장소인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시민위원310 여러분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 같지만 백년 남짓한 시간 안에 일어난 일들.
먼 곳 같지만 출퇴근길 항상 걸어다니던 곳.
그 길을 함께 걸어주시고 후기를 보내주신 모든 시민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억해야 할 공간

 

최다연 시민위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가을 향기 그득한 주말 오후였다.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장소들, 아무 생각 없이 거닐었던
그 공간들의 의미를 새기며 걸었던 날이었다.

답사 내내 김춘수의 「꽃」이 떠올랐다.

연인들에게는 데이트 코스, 또 어떤 이에게는 출근길이었을 그 길,
수많은 길 중 그저 하나의 길일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걷고 의미를 새긴 후 그 길이 살아나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기억해야 할 공간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시작과 끝. 그 길을 시민위원과 함께 걸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과 덕수궁, 알수록 아픈 이름 중명전, 손탁호텔과 고종황제의
아관파천 장소인 구 러시아 공사관까지 안타깝고 아픈 그 공간을 함께 걸었다.

그중에서 환구단과 중명전은 유난히 아팠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선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 지내는 종묘,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과 함께 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거행하던
중요한 장소였다. 하지만 조선은 황제만이 천자로서 천제(天祭)를 올릴 수 있다는
명의 외압으로 인해 세조 이후 이를 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고종이 황위에 오르고 근대적 자주 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이곳 환구단에서 하늘에 이를 고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제는 반드시 이것을
없애야만 했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환구단이 헐리고 호텔이 들어섰고
지금은 황궁우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호텔에 딸린 정원쯤으로 보일 지경이니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거듭 중 重, 밝을 명 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의 중명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름과는 다르게 시련의 근대사를 간직한 현장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장소이며 화재로 인해
크게 훼손되었고 최근까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수시로 변경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길을 아이와 꼭 함께 걷고 싶었다.
500년을 이어오던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이 되고 그 시작과 끝이 녹아있는 그 길을
아이가 아직은 어리지만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가 다치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하고 엄마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너무도 안타깝고 수치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애써 외면하며 자세하게 알려 하지 않았고
거부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공부하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아가고 공부해야 우리의 역사를 마주할 자신이
생기고 그래야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공간을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시민위원들과 함께 했던 강연과 답사들이 시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다뤄지고 학생들의 교육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방법을
다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게 말이다.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 – 훼손된 얼룩진 역사의 재인식 필요

환구단 – 덕수궁 – 중명전 – 손탁호텔 – 구 러시아 공사관을 찾아가다

 

이재찬 시민위원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17.10.21. 토요일 조선호텔 앞 환구단(圜丘壇) 터에서
많은 시민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행사를 가졌다.
코스는 환구단 – 덕수궁 – 중명전 – 손탁호텔 – 구 러시아 공사관순으로
해설은 여느 때와 같이 서해성 총감독이 맡았다.

 

첫 번째 유적인 환구단은 사적 제 157호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제천의식의 명분론과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기우제의 필요성으로 원단의 설치와 폐지가 거듭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3년(1394)과 세종 원년(1419)에 일시적으로
원단제를 시행하였으며,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었으나 세조 10년(1464)에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은 원구단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반면, 우리는 독립성을
나타내기 위해 환구단이라고 부른다.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남별궁은 역대 왕의 명·청나라의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였다.
1899년 단지 내에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축조하고
태조의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다.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그 이후 일제는 1913년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없애기 위해
환구단을 헐고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세운 것이다.

 

 

 

둘째, 덕수궁(德壽宮)은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훼손되었다.
일제는 우리를 지배하면서 궁궐이 지니고 있는 국권과 주체성을 파괴한 것이다.
1910년 당시의 덕수궁 평면도를 보면 덕수궁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선원전터를 헐고 경기여고(전 경성제일여고)를, 길 건너 제사 준비소터에는
덕수초등학교를 각각 건립했다.
지금의 성공회성당이 들어선 정동 3번지 일대에 있던 귀족 자제들의 교육시설인
수학원(修學院)을 헐고 경성방송국을 짓기도 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일제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으로 신변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1907년
물러나기까지 사용하였다. 당시 일제는 1880년대에 경운궁터의 일부를 서구 열강(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공사관 부지로 떼어주었다. 광무 11년(1907) 8월,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로 물러앉았다. 이때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 정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의 궁호를 따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한문은 지금은 덕수궁의 정문이지만 원래 경운궁의 동문(東門)으로 대안문(大安門)이라 불렸다.
경운궁의 정문은 중화전과 중화문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 위치는 현재 서울시청사 별관 건물 자리이다.
덕수궁의 돌담길 또한 원래는 덕수궁 영역의 일부이다. 1922년 일제가 덕수궁 서쪽에 있던
선원전(璿源殿)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면서 생긴 길이다. 이로써 동문인 대안문은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자연히 정문의 구실을 떠맡게 되고,
인화문은 정문의 기능을 잃으면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1906년에 ‘대안’이라는 이름이 불안하니 나라의 평안을 위해 ‘대한’으로 바꾸자는
풍수상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대한문은 1914년 태평로가 생길 때와
1968년 도시계획으로 인해 본래 위치에서 뒤로 밀려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현재 지상에는 대한문을 오르던 기단 양옆 계단의 소맷돌과 조각된 서수가 남아 있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대한문의 현판은 당시 한성부 판윤을 지낸 남정철의 글씨다.

 

 

 

셋째, 사적 제124호인 중명전(重明殿)은 정동극장을 끼고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다보면
막다른 곳에 위치한다. 중명전은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1897년 경운궁의 확장과 함께
궁궐로 편입되었는데,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 의해 황실도서관 용도로 지어진
러시아식 2층 벽돌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과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중명전의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며, 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비운(悲運)의 장소다.
한일합방 뒤에는 외국인의 사교모임인 ‘경성구락부’로 쓰였다.
지금의 모습은 1925년 화재 후 벽채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넷째, 손탁호텔은 1902년 정동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 경영의 효시이다.
손탁(Sontag, A. 孫澤, 1854∼1925)은 1885년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 K. 韋貝)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손탁은 웨베르 공사 부인의 언니(처형)로
독일국적을 갖고 있었고 많은 외국어에 능통하여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대군주(고종) 및 명성황후와 친밀하게 되었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親露拒淸)정책을 수립,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공로로 조선정부는 1895년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하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한국 최초의 배일정치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친미파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발족되었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토역(復讐討逆: 복수를 위해 역적토벌), 친일내각 타도,
경복궁에 갇혀있던 고종 구출 등을 정치적 투쟁목표로 표방하고 정동소재 손탁 사저에 모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손탁 사저는 친러반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가 되었다. 1898년 고종황제는 한국독립을 위한
손탁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구 한옥을 헐고 양관(방 다섯 개)을 지어서 하사하였다.
이 때 손탁은 실내장식을 서구풍으로 꾸며서 손탁빈관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외국 귀빈들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고 숙박시킬 영빈관이 필요하여
1902년 구 양관을 헐고 2층 양관을 신축, 손탁으로 하여금 이를 경영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호텔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이용하였고, 아래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주방,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1909년 손탁이 귀국한 뒤, 1917년 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손탁호텔을 구입,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년 건물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하였지만, 1975년 소실되어 현재는 정동교회 뒤쪽에 공터로 남아 있다.

 

 

다섯째, 구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의 설계는 중명전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며,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다.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모양의 2연창(連窓)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현재는 탑부만 남아 있는데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덕수궁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로서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하여 있던 곳인데, 파천중 친일 김홍집(金弘集)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徐載弼) 주재의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등
다난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지금은 6·25전쟁 때 건물은 파괴되고 탑 부분과 지하 2층이 남아 있었는데, 1973년 현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1977년 사적 제253호로 지정하였다.

 

 

이날 행사를 통해 “나라의 힘이 약하면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된다. 이로 인해국가의 정통성은
물론 유적과 유물이 훼손되는 얼룩지고 왜곡된 역사를 안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통감하게 된다. 국가의 힘이란 통치자와 지도층, 그리고 국민 모두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줄 때
나오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해서는 공멸할 수 밖에 없다.
훼손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노력과 역사교육이 수반될 때
우리의 미래는 유비무환이 될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제국의 길’에서 배우다.

 

최용수 시민위원

 

 

유구한 반 만 년 우리 역사 중 ‘제국(帝國)의 시대(時代)’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거기엔 어쩜 당연한 까닭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동길을 걸으며 제국의 슬픈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종이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제를 올리며 황제에 즉위한 1897년 10월부터
환구단(圜丘壇)에서 국치일인 1910년 8월 29일까지
제국의 역사 13년을 환구단, 덕수궁, 중명전, 손탁호텔, 구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 상기해 보았다.

 

 

첫 방문지 환구단((圜丘壇, 사적 제157호)은 역대 왕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 배원친명(排元親明) 정책으로 중단되었다가 본격적인 제사는 1897년 환구단을 건립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때이다.
그러나 일제는 1913년 대한제국 정통성의 상징인 환구단을 철거하고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짓는다.
현재는 신위를 봉안하던 팔각의 황궁우(皇穹宇, 환구단 부속건물)와 황제의 상징인 용 문양을 새긴 계단뿐이다.
고종 황제의 즉위식과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환구단의 유물이
한 호텔의 정원 장식용으로 남아 있는 모습에서 일제의 계략을 느낄 수 있었다.

 

 

경운궁(慶運宮,덕수궁)은 본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으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몽진(긴급피난)하였다가 돌아온 선조가 임시 기거하면서 임시별궁으로 삼았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왕궁으로 사용하다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시 경운궁이 있는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주 무대였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이곳에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연호(年號)는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한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출범과 더불어 격동기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운궁의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중명전(重眀殿)은 1897년 고종이 경운궁 확장 공사를 하면서 궁궐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1899년 황실도서관(Imperial Library) 용도로 준공된 것이다.
1905년 11월 불법적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치욕의 장소이며,
1907년 4월 20일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상설 등 3인의 특사를
헤이그로 파견하던 곳이다. 일제 때인 1912년부터는 외국인 사교클럽으로,
해방 후에는 서울클럽으로 사용되던 것을 2006년 문화재청이 인수하여 복원공사를 마치고,
현재는 대한제국의 역사교육장이 되어 있다.
을사늑약 체결 등 전시물은 힘없는 나라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듯 했다.

 

 

이어 답사단은 독일 여성 손탁(Sontag, 孫鐸)이 건립한 최초의 서양식 호텔 인
‘손탁호텔(Sontag, 孫鐸)’ 자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수많은 제국의 비화와 독립을 위해 노력한 외국인 헐버트와 베델의 주요 무대였고,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伊藤博文)가 머물며 ‘을사늑약’을 압박했던 공작 장소이기도 했다.
비운의 역사를 이어가기에는 부끄러운 듯 호텔 터 표석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국이 길의 마지막 답사 코스는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정동 예원학교 옆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니 언덕 위에 이국풍의 우뚝 선 흰색 탑이 눈에 들어온다.
르네상스풍의 옛 러시아(아라사) 공사관의 탑이다.
일본을 견제하려는 고종은 세자(순종)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이듬해 2월까지 머물렀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러시아 공사관, 탑 외에는 빈터만이 남아 있다.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고종, 타국의 공사관에 피신하여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답사한 ‘대한제국의 길’이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버린다면 식민지배가 당연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서해성 총감독의 이야기는 어떻게 역사를 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준 뜻깊은 시간이었다.

 

 

 

100년 답사 세 번째 길 –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

대한제국은 어디서 시작되고 어떤 길을 걸었을까요?
가을냄새가 완연했던 10월 21일 토요일.
시민위원들은 환구단에서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함께 걸으며
우리 근대역사의 꿈과 아픈 부분을 확인하였습니다.


 

출발지는 환구단이었습니다.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서
황제가 되었습니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특별한 행위를 통해 되는 것이 아닌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오직 왕만이 제사를 지내는 권한을 갖고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 환구단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철거되고 호텔이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운 층 8각정 황궁우만이 남아있습니다.

커다란 빌딩숲 사이에서 3층 높이의 목조건물은 그리 큰 것이 아니지만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을 당시를 상상해본다면
이곳은 하늘만큼 높은 곳이었을 겁니다.

발걸음을 옮겨 덕수궁 근처로 향합니다.

덕수궁(경운궁)은 고종이 1897년 2월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1897년 10월 12일 황제로 즉위한 이후 1907년 물러나기까지 머물렀다고 합니다.

대한문 역시 지금 자리보다 더 앞으로 나와있었고
현판 역시 대한문(大漢門)이 아닌 대안문(大安門)이었다고 합니다.

중명전.
광명이 그치지 않는 전각.

그러나 그 이름과는 다르게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불법적으로 체결된 곳이죠.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이 건물은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이곳이라고 합니다.

아관파천의 현장인 옛 러시아 공사관에서 답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처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근대로 새롭게 발걸음을 떼었던 환구단에서 시작하여
왜세의 압박에 열강의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야했던 현장까지 걸으며
시민위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혼란스러운 나라 속에서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누군가에게는 출근길, 누군가에게는 데이트코스인 길 속에 대한제국의 시작과 끝이 있었습니다.
2.6km가 되는 길을 걸으며 100년 전으로 돌아가봤던 <100년 답사 세 번째 길 –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
함께 걸어주신 시민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