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위원310 2018년 활동보고회

어느덧 2018년도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11월 23일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 이렇게 많은 시민위원310이 모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6월 16일, 2018년 첫 모임이 있었던 날 이후로 오늘까지 그동안 있었던 행사들을 마무리하고
3·1운동 100주년의 시작을 준비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파티에 앞서 청색100 위원으로 활약했던 모윤석, 강지성군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해왔습니다.  직접 준비해 온 피아노 연주와 랩으로 멋있게 파티를 축하하기 위한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오늘 파티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후손이신 이종걸 의원과 김구 선생의 증손자이신 김용만 단장님께서도 참석 해주셨습니다.

한 해 동안 시민위원310 위원들과 함께 3·1운동 100주년과 독립운동 관련 행사에 늘 함께해주신 두 분께 추억이 담긴 포토북을 기념품으로 전달해드렸습니다. 항상 독립운동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고 의미를 알리기 위해 시민위원과 함께 달려온 두 분 또한 이렇게 뜻 깊은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서 매우 기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한 해 동안 어떤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으셨나요? 일 년 동안 함께했던 다양한 활동을 영상으로 돌아봤습니다.

100년 학교 시리즈 강연으로 3·1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보았고, 대한민국민주공화정의 역사와 항일무장투쟁의 요람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여름에는 머리를 맞대고 치열한 토론을 펼쳤고, 여성독립운동가이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였던 이은숙 선생의 ‘서간도 시종기’를 같이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민위원과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3·1운동을 이끌고 앞장서서 목소리를 냈던 학생들처럼, 지금의 우리세대 청년들과 함께 젊고 참신한 3·1운동 100주년을 만들어가고자 올해는 33인 청소년위원회를 확대하여 ‘청색100’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청색100 위원들이 모여 자신들의 목소리로 3·1운동을 어떻게 알리고자했는지 그 활동 결과물을 발표했습니다.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직접 영상을 촬영하여 발표하는 청색100 위원들의 모습을 보니 다가오는 3·1운동 100주년이 더욱 기대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많은 시민위원분들이 시민위원310 활동에 함께해주셨습니다. 특히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신 시민위원분들을 대상으로 우수활동자를 선정하여 나무 상패를 드리며 함께 축하했습니다.

시민위원310 행사가 있을 때마다 솔선수범하여 자원봉사 해주신 시민위원 분들에게는 아나키스트 모자를 기념품으로 전달해드렸습니다.

글을 통해 3·1운동 100주년을 널리 알려주신 시민기자분들께도 감사의 뜻을 담아 기념품을 전달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시민위원310  위촉 대표에게 위촉장을 수여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위해 앞으로 더욱 적극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모든 수여식이 끝난 후 압록강행진곡을 다같이 부르며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2019년 드디어 3·1운동이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주년을 위한 파티는 시작되었습니다.  내년 3월 1일,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실까요? 여러분과 함께 서울광장에 서는 그 날을 기대합니다.

2018년도 열심히 활동해주신 시민위원310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간도 시종기 낭독회 “우당의 죽음, 그리고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의 쓸쓸한 삶”

11월 17일 제법 바람이 찬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위원310 위원분들이 모인 이곳은 덕수궁 중명전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 곳. 그리고 그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장소도 바로 이곳 중명전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을씨년(乙巳年)스러운 오늘, 세 번째 <서간도 시종기> 낭독회에 앞서 덕수궁 중명전을 둘러보며 그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중명전은 본래 황실의 서적과 보물을 보관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덕수궁에 큰불이 나면서 고종이 머무는 편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쳐 복원된 후 누구에게나 공개되고 있지만 평소에는 개방되고 있지 않은 2층도 오늘만은 특별히 개방하여 낭독회를 진행했습니다.

세 번째 낭독회를 위하여 특별한 분들이 참석해주셨습니다. 이은숙 선생의 후손이신 이종찬 위원장 부부가 참석하시어 낭독에 함께 해주셨고,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박경목 관장이 낭독자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첫 낭독자는 이종찬 위원장이었습니다. 11월 17일 오늘은 을사조약 체결일이기도 하지만, 우당 이회영의 서거일이기도 합니다. 우당은 전 재산을 팔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순간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았습니다. 우당은 을사늑약 체결 후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규탄 운동을 벌이고, 고종에게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한 헤이그 특사 파견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고종이 밀서를 하교하신 그 장소인 것입니다.  선생이 뤼순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순국한 날을 아내 이은숙 선생의 심정으로, 손자 이종찬 위원장의 목소리로 함께 낭독하니 그 슬픔과 황망함이 더욱 가까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우당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가족들의 삶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아들 규창은 수감 생활 중 옥중 투쟁으로 13년형이 추가되어 영천형무소(현재의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광주형무소를 전전하며 옥살이를 계속했고, 이은숙 선생은 그런 아들을 옥바라지하며 고달픈 나날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옥살이를 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고되고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배고픔이라고 합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먹던 수감자들은 항상 복통이나 소화 불량 등에 시달렸고, 심지어 아교나 가죽을 씹어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굶주림과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독방 생활을 모두 견뎌가며 십여 년을 보낸 아들 규창의 나날을 떠올리면 독립운동가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시민위원310 위원분들도 낭독에 참여해주셨습니다.  한 분 한 분 지금 이 순간만은 이은숙 선생이 되어 그때의 심정은 어떠했는지,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 소리 내어 읽음으로써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낭독해주신 시민위원분들께는 이은숙 선생의 후손인 이종걸 의원의 친필 손글씨가 쓰여있는 <서간도 시종기> 책을 선물해드렸습니다. 이 책을 펼 때마다 우리가 함께 책을 읽었던 지금을 떠올리며 우당 이회영과 영구 이은숙,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의미 깊은 선물이 되길 바라봅니다.

우리는 지난 6월부터 세 번에 걸쳐 이은숙 선생의 자전적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를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낭독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앞장선 우당 이회영 가문의 독립운동뿐 아니라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재조명해 보았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뒤에서 배우자라는 수식어에 가려졌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되돌아보고, 항일이 중심이 아닌 생활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도 만나보았습니다.

다 같이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모두가 함께 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제강점기 발행했던 독립신문은 많은 부수가 팔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 백성에게 널리 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 같이 모여 독립신문을 함께 낭독하고 그 뜻을 전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간도 시종기>를 낭독한 것은 그 뜻을 공유하고 널리 퍼트리기 위한 것입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워야만 했던 역사를 기억해주세요. 우리의 이 뜻은 3·1운동 100주년까지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100년 학교 시리즈 강연 ③ <신흥무관학교, 입교하는 날>

 

 

2018년 100년 학교 시리즈 마지막 강연을 위해 입장하는 시민위원310 발걸음이 아주 씩씩합니다.
그 어느때보다 신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강연 주제가 바로 <신흥무관학교, 입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이 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강연장에 들어선 것입니다.

 

‘신흥무관학교 입교식’은 역사학자 서중석 선생이 맡아주셨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이자 1세대 역사학자로 잘 알려져계십니다.
무엇보다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던 시절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2001, 역사비평사) 단행본을 발간하는 등 의미있는 연구와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신 분입니다.
이 날은 서중석 선생의 제자들도 100년 학교 강연을 청강하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위원장 역시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는 날이라 왔습니다!”라는 유쾌한 문장으로 소감을 밝혔습니다.
아마 아주 어릴때부터 신흥무관학교 입학생이 아니셨을까 싶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물었습니다.
“식민지 시절을 겪었던 다른 나라들도 외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을까요?”
나라를 잃은 순간 당연히 독립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만 사실 한국만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하며 식민시절 시작 직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한 나라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해외활동을 빼놓고는 절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만주, 상하이, 연해주, 일본, 미국, 멕시코, 쿠바 등 독립운동 무대는 아주 넓고 광대했습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일제강점기 아래 한국은 한번도 기본적인 자유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근대의 기본권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고 이것은 일본패망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문자로 출간, 출력되는 모든 것을 게엄상태와 똑같이 검열받았습니다.
1920년대 문화통치 시절에도 한번도 검열받지 않은 문서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수 많은 신문사와 출판사가 압수당하고 종간을 강제로 선언해야했습니다.

3·1운동 이후 옥내 집회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으나 항상 감시대상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자유가 없었고 정치적 활동 역시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일제의 감시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운 땅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목표로 고향을 떠나 만주로, 상하이로, 미주로 간 것입니다.
어렵다고 포기한 것이 아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고 확장한 것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는 세워진 뒤 3·1운동까지 한번도 쉰 적이 없는 학교라고 합니다.
학교가 없어진 뒤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더욱 대단한 활동을 하며 활발히 명맥을 이어나갔습니다.

1910년 무단통치로 암울했던 시기 어째서 신흥무관학교는 이렇게 잘 싸울 수 있었을까요?
바로 지도층이 매우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이회영과 6형제를 비롯하여 이동녕, 이상설, 김동삼 등 아주 중요하고 탄탄한 초석이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 간도 지방 주민들도 소작농 출신으로 고통을 잘 이겨내고 끈기가 아주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동질성이 강한 주민들은 신흥무관학교의 지속성을 더했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말하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돈이 많았습니다.”
사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 최고의 부자가 전 재산을 털어 세운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신흥강습소’에서는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출신 여럿이 교관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3·1운동에 대해서도 단순한 만세운동 차원이 절대 아니며 우리 민족사에서 광복절과 함께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라 정의하였습니다.

3·1운동 전 한국 모습은 어땠을까요?
1910년대 진행된 무단통치로 한국인은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무자비한 무단통치 아래 미래가 없고 인간으로서 긍지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염상섭의 <만세전>은 말 그대로 ‘만세 이전前’ 이라는 뜻입니다. 원 제목은 ‘묘지’라고 합니다.
3·1운동 직전 한국의 모습은 마치 묘지와 같았다는 말이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져있고 내일이라는 것을 모른 채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모든 말과 글을 검열받고 숨소리도 제대로 내기 어려운 시대상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있었습니다.
200만 국민이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르고 봉건에서 근대로 달려나갔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외치고 울부짖었던 ‘대한독립만세’로 한국인은 깨어나고 정말로 독립이 가능하겠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인간, 여성, 노동자, 농민, 백정 모두가 새롭게 인간으로 탄생하는 순간이 3·1운동이었습니다.

모든 강연이 끝나고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총감독과의 토론도 진행되었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역사학자로도 많은 연구를 하셨지만 민주화운동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겪고 동지도 잃었지만 덤덤하게 웃으며 당시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를 풀어나가셨습니다.
“그래도 독립운동보다 힘들지 않았다. 그런 위로를 친구들과 하며 견뎠다.”
선생의 깊은 말씀으로 강연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칼춤추고 말을달려 몸을단련코
새론지식 높은인격 정신을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새나라 새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두팔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떳다.

 

신흥무관학교 교가 3절부분입니다.
‘썩어지는 우리민족’.
식민지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유학생이 보았을 때 ‘묘지’이며 ‘썩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새나라를 세우고 우리도 인간이라는 자각을 끊임없이 하였으며 국내에서 해외에서 멈추지않고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날 시민위원310은 강연장을 나서며 신흥무관학교 학생으로 3·1운동 100주년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것입니다.

시민위원310 참석후기

올해도 3·1운동 100주년 행사와 강연에 많은 시민위원310 위원이 참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분들이 참여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때의 마음과 경험을 단단히 다지는 일일 것입니다.
여기 시민위원310 후기를 소개합니다. 함께 읽으며 그 날의 배움과 감동을 되살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백년을 향하여

최다연 시민위원310

폭염의 연속이었던 한여름 밤 여의도에서 만난 어느 소년 광복군의 비행.

어린 두 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은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이고 삼일운동, 독립운동, 국치 등을 모를 나이지만 이런 활동들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나라에 대한 생각과 우리 역사에 대한 생각들이 생겨나고 미래를 이끌어갈 올바른 역사의식의 씨앗이 심어질 거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쇼를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오늘 비행기에 대해 간단하게 알려주고 영상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평소 ‘헬로 카봇’에 푹 빠져있는 작은 아들이 영상 속 소년 광복군의 모습을 보고는 ‘헬로 카봇’의 주인공 남자아이 ‘차탄’ 같다고 했다. 그만큼 친숙한 존재로 다가왔다는 의미이다.

무겁지 않지만 장엄하고 가볍지 않지만 친근하고 어렵지 않지만 쉽지 않고…… 행간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나름의 의미로 다가왔을 영상쇼. 대한민국의 의미를 알고 난 이후 마주하니 덥고 지친 한여름 대지를 적시는 빗줄기처럼 반가웠다.

 

 

내 옆의 독립과 친구 맺기

김기혁 시민위원310

평소 토론을 많이 해보지 않았고 주제인 독립운동에 대해서 잘 몰라서 조금은 긴장했었습니다.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영상 ‘어느 소년 광복군의 비행’ 을 시청했습니다. 여의도공원에서 C-47 비행기를 통해 감동적으로 봤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또 보니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치열하고 꿋꿋하게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토론의 주제로 ‘윤봉길, 안중근, 이봉창은 애국자인가 테러리스트인가’를 선택했습니다. 김용만 단장님의 진행으로 조원들과 인사를 하고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위원님은 폭탄 투척, 저격 등의 방법은 그 목적이 공포와 혼란이기 때문에 테러와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위원님은 우리는 약소국인데다가 고립됐었기 때문에 과격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 결과로 우리나라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며 정당한 활동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개인의 저항이 아니라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국주의는 피지배민족의 침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저항과 불복종에 막혀서 오래갈 수 없으며 독립운동은 그 일환이라고 했습니다. 위원님들이 말했던 주장들을 전지에 간략하게 적어 발표할 내용을 만들었습니다. 조별 주재자님들이 옆에서 도와주셔서 덕분에 수월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달아올랐던 조별 토론이 끝나고 전체 발표와 피드백을 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친일 예술, 위안부 협상, 항일 유적 관리, 우리말 속 일본어에 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주제는 각자 다르지만 어두운 과거의 고통이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데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서 밝은 미래로 나아가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은 멀리있는 100년 전 무겁고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살아 숨쉬며 일상생활에서 피부로 와닿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들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고 새롭게 발전시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C-47 비행기 영상에서 과거의 독립운동가가 미래에서 온 소년에게 빛나는 별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문가 선생님들이 발표 내용을 짧게 정리하고 위촉장 수여식 후에 행사는 마무리됐습니다. 토론은 소수의 발제자와 진행자가 주관하면서 청중들이 질문을 하는 형식이 아니라 참가한 시민들이 모두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독립운동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독립 정신을 이어갈 방법과 그것을 어떻게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인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서해성 감독님 및 김용만 단장님, 전문가 선생님들, 1기 위원님, 청소년 위원님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시민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이웃들과 함께할 독립운동 행사가 기대됩니다.

 

 

최다연 시민위원310

<시민토론캠프>에서는 시민위원들이 모여 6가지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6개의 주제 중 ‘친일예술, 예술인가 친일인가’ 주제에 참여하였다.

* 예술이 아니다 – 예술은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없이 정치적 도구로 기꺼이 이용되었다.
* 예술이다 – 시대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예술이다. 그렇지만 친일행위다. 나쁜 형태의 예술로 소개하고 교육용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 토론 주제가 잘못된 것 같다. ‘친일 예술,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로 바꾸는 게 좋겠다.

시민위원들과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누다보니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 시절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과 이름 없는 영웅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의 열띤 토론을 마무리 하고 나머지 주제 토론에 대한 결과를 들었다. 모든 토론 주제를 관통하는 중심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였다.
모두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올해 시민위원으로서의 활동 목표를 ‘알리는 것’으로 정했다.

올해는 평일 일과시간 행사가 많아 아쉽지만 참여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백년을 열기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열심히 알리고 있다. 올해 나의 활동 목표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온 백년이 비통하고 굴곡진 백년이었다면 새로운 백년은 평화와 번영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대한 독립을 위해 애쓰신 수많은 선조들의 피와 땀에 보답이 되는 백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유재훈 시민위원310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2015.12.28일 日本외상과 韓國 외교부 장관간에 정부합의가 이뤄졌으나 핵심사항인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가 이뤄지지 않아 한국내에서 위안부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분들과 많은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 직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정부간 합의 당시 일본 외상은 일본의 사과가 정부를 대표하는 일본총리의 사과라고 했으나 총리가 직접적인 발표를 하지 않아 사과의 진정성에 많은 한국 국민이 의심을 품게 되었다. 또한 10억엔의 위로금도 배상금이 아닌 보상금 성격으로 몇 단계의 관련 단체를 거쳐 핵심사항인 일본의 사과가 더욱 의심받게 되었다.

위와 같은 일본의 비이성적 태도에는 위안부 문제를 인정시,국민들 특히 청소년등 후손이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되므로 이를 은폐하고자 과거사를 계속 날조하고 있다. 일본 아베총리의 외할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총리로 1급 전범이나 사실상 처벌을 받지 않았고 위안부 문제 인정시 외조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이러한 배경이 아베 총리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나의 개인 생각으로는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은, 현실도 부정하고 미래도 뒤틀린다는 과거의 사례에서 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재찬 시민위원310

이날 행사에는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과 많은 시민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운동가 원종린 선생의 후손인 동아대학교 국제학부 원동욱 교수의 사회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서해성 총감독의 소개로 심포지엄이 시작했다.

제1주제 「세계 망명정부, 임시정부 연구」에서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임정 승인 문제는 국제법적이라기보다 국제정치적인 것이라고 봤다. 강대국 힘의 정치(power politics) 논리에서 중국·미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역학관계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어 2차 대전 이후 현대 국제법에선 인민자결권이 본질적 원칙이기 때문에 임정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며 “건국의 본질은 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해영 교수의 주제에 대한 지정토론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진행했다. 임시정부의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승인 받지 못한 이유와 연합국 승인 이후 임시정부 처리과정 등을 질문했다.

제2주제 「상해 임시정부 활동 연구」에서 쑨커즈(孫科志) 중국 푸단대 교수는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과 더불어 중국 혁명 활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특히 항일전쟁에 가담한 점은 중국 근대사, 한중관계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밝히면서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했다. 정부 수립 후 외교활동, 무장투쟁, 의열투쟁을 통해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쑨커즈 교수의 주제에 대해 윤대원 서울대 교수는 지정토론자로서 1920년대 이후 중국 관내를 벗어나지 못한 상해 임시정부의 위상과 현재 중국 대만과의 관계를 예시로들며 법통성 문제에 관하여 질문했다.

제3주제 「노령 임시정부 활동 연구」에서 박환 수원대 교수는 1919년 대한국민의회라는 정부조직을 만들어 활동한 러시아 임시정부의 성립과 활동에 대하여 설명했다. 1919년 대한국민의회라는 정부조직을 만들어 활동한 러시아 임시정부의 성립과 활동에 대하여 설명했다. 러시아지역의 3.1운동 발발에는 한인신보, 한족공보 등 한인신문들의 역할이 컸다. 만주지역의 간도와 훈춘지역의 대표들까지 참여한 대한국민의회는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소비에트 식으로 조직되어, 의회기능뿐 아니라 행정부 기능도 포괄하고 있었다.

이날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총감독은 인사말을 통해 “세계 망명정부와 임시정부 심포지엄은 오랫동안 국내에 한정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과 시야를 세계로 넓혀 생각해보고자 마련한 자리다. 이는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학술 토론회다”라며 의의를 설명했다. 서 감독은 이어서 “프랑스 망명정부가 종전 뒤 어떻게 법통을 재창조해냈는지, 베트남 임시정부가 해방 뒤 어떻게 법통을 이어갔는지 살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치와 위상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4시간에 걸쳐 진행된 국제심포지움은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국제적 승인의 당위성을 실감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의 집단적 자유의지는 이를 실천할 초석이 될 것이다.

 

 

서간도 시종기 낭독회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삶”

9월 18일, 서간도 시종기 두 번째 낭독회가 열린 장소.
이곳은 어떤 공간일까요?

바로 종로구 통인동에 위치한 ‘우당기념관’입니다.
오늘 이 곳에서 이은숙 선생의 <서간도 시종기> 두 번째 낭독회를 진행할 것입니다.
주제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삶”입니다.

같은 날 오전 <안국역 다시 문 여는 날>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시민위원310 위원분들은 오전 행사까지 마치고 오후 낭독회까지 참석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은숙 선생의 후손이신 이종걸 의원도 안국역 행사에 이어 낭독회까지 참석해주셨습니다. 지난 첫 번째 낭독회에도 부인과 함께 낭독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낭독회 낭독자로는 아주 특별한 분들을 모셨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 농성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강주룡 선생에 대한 책을 쓴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 2018)의 저자 박서련 작가.
12년이라는 시간동안 해고 노동자로 긴 싸움을 해나갔던 김승하 KTX 승무원 지부장.
청소 용역 미화원들의 권리를 위해 활동해오신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김주실 전 고양지부장.

모두 이은숙 선생처럼 ‘여성’과 ‘노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계신 분들입니다.

<서간도 시종기>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매우 자세히 담고 있는 책입니다. 이은숙 선생의 손자인 이종걸 의원의 말에 의하면 아들이 만들어준 공책 위로 이은숙 여사는 100% 기억에 의존해 당시 삶을 적어내려가셨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은숙 선생은 한번도 학교를 다니지 않으셨던 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구어체로 생생히 담겨있는 <서간도 시종기>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항일이 중심이 아닌 생활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을 <서간도 시종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글을 쓰셨던 이은숙 선생은 하루일과가 끝난 아들에게 “얘야, 오늘은 이만큼을 썼단다.”라고 자랑하셨고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말에 “아이구 잘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제일의 부자이자 사대부집안인 우당 이회영과 6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무술을 익히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6형제 중 2명은 굶어 돌아가셨고 만주에서는 소금국으로 끼니를 이어가야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계속된 독립운동으로 돈이 떨어진 우당은 난을 그려 중국사람들에게 팔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우당의 필법은 대원군의 필법과 같았고 대원군의 필법은 추사의 필법과 같았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대원군과 추사의 그림을 사기 위해 많은 이들이 큰 돈을 지불하였고 우당은 이들에게 난을 그려주고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한 것입니다.

난잎이 칼이 된 순간입니다.

자료제공=이종걸국회의원사무실

이날 이종걸 국회의원은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의거 전날 머물렀던 안봉근 선생의 집에서 찍은 사진을 공개하였습니다. 우리 항일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인 상하이 의거 전날,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결의를 다지며 시계를 교환하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은 장소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표식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놀라고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손녀 윤주경 선생 낭독이 더욱 특별하였던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시민위원310은 이곳에 시민위원310의 이름으로 작은 표식이라도 새기자며 의견을 모았습니다.

<서간도 시종기>(일조각) 151쪽 낭독 음성입니다.
안그래도 어려운 살림에 아이들까지 병이 나 힘들어하였던 이은숙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낭독회를 마치고 서촌 일대를 답사하였습니다.
서촌 곳곳에는 미쳐 알지 못했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촌 마을 전체가 거대한 친일파 집안이라는 것입니다.

경술국치에 ‘공’을 세웠으며 서촌 땅 절반이 그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담장 안이 웬만한 마을 크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덕영은 딸을 위하여 1938년 건물을 하나 세우는데 그 집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한옥, 양옥, 중국식 건축기법이 혼재된 이 건물은 벽난로 3개를 설치하는 등 호사스럽게 꾸며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73년 화가 박노수가 이 건물을 인수하고 현재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서촌에는 이완용 저택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말을 보내기 위해 방문하는 곳에도 친일의 역사는 존재하였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대저택을 지어놓고 살았던 두 친일파를 생각해볼 때 당시 그들의 권세와 부가 하늘을 찔렀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조선 최고의 부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굶어죽었는데, 나라의 주권을 넘기는데 가장 앞장 선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한 응당한 처벌은 제대로 진행이 되었나 자문해봅니다.

시민토론캠프310 <3·1운동은 토론이다>

 

독립운동에 대해, 3·1운동에 대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말을 하고 자기 주장을 펼친 적이 있었을까요?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지금 더 열정적으로 독립과 친일과 3·1운동, 우리 말 등에 대해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018년 8월 25일
여름 끝자락에서 시민위원310이 만나 6개 주제로 뜨거운 토론을 벌였습니다.
결코 만만한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1주제 : 여성독립운동가는 누군가의 아내인가 독립운동가인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2주제 : 윤봉길, 안중근, 이봉창은 애국자인가 테러리스트인가 (김용만 시민위원310 단장)
3주제 : 친일예술, 예술인가 친일인가 (배다리 공공미술작가)
4주제 :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 왜 사과해야 하나 (박찬승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5주제 : 중국에 있는 항일유적, 어떻게 해야 하나 (원동욱 동아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6주제 : 우리말 속 일본말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성기지 한글학회 학술부장)

시민위원310은 직접 선택한 주제를 가지고 모여앉아 토론을 벌였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토론이 엇나가면 각 조별 주재자들이 조언을 해주고 진행을 도와주셨습니다.

 

시민위원310은 테러와 독립운동 활동을 구분짓는 기준에 대해 토론하고 이미 뿌리박힌 일본어의 예시를 찾으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무엇보다 학생신분인 시민위원310 위원도 본인 의견을 적극 이야기하고 나름의 논리를 근거로 주장을 펼쳐나가는 장면도 쉽게 볼수 있었습니다.

3·1운동 당시 200만 백성이 광장에 나와 독립을 외치며 깨어났던 것처럼
시민위원310 100명이 모여 나누는 토론 역시 3·1운동의 연장선일 것입니다.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민위원310 위원의 주체적인 모습은 참으로 인상깊고 멋진 장면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고민도 있었습니다.
이런 토론에서 나온 의견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정말 우리 의견이 토론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로 이루어져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도 관리가 잘 되고, 친일미술도 교과서에 실려 아이들에게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게 해야하는데 실현 가능한 일인가?

한시간 이상 토론한 결과를 큰 종이에 옮겨 적은 뒤 사진을 찍어 대형 스크린에 띄웠습니다.
토론 결과를 발표하고 종합 토론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는 누군가의 아내인가 독립운동가인가’ 라는 주제로 토론을 진행했던 1,2조는

  •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도 있고 민족주의도 있고 여성주의 역시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해야한다.
  •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고 주체적으로 그 정신을 이어가야한다.
  • 유관순 열사 역시 3등급의 서훈을 받으셨는데 1등급으로 승급시켜달라는 청원도 시민위원310의 이름으로 진행해보면 좋을 것 같다.
  • 우리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영화와 드라마로만 접하고 있다. 이들을 재조명하고 발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 3·1운동이 일어나고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데 다시 10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한다. 그것이 3·1운동의 정신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윤봉길, 안중근, 이봉창은 애국자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주제로 토론을 한 3,4조는

  • 테러는 공포 확산이 목적인 행동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행위로 국제적 관심을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많은 무장독립운동가들은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 대상을 선정하고 구국과 관련이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 더불어 관련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했으며 ‘총알에도 눈이 있다고 생각하자’는 어느 영화 대사처럼 일반 시민에게는 피해가 없도록 최대한 신경을 썼다. 테러가 아닌 의열이다.

이러한 3,4조 토론에 대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독사 한 마리를 죽임으로써 죄 없는 까치새끼 10마리를 살리는 것이 참 불법의 가르침이라는 말을 생각해봐야한다.”라는 평을 주었습니다.

‘친일예술, 예술인가 친일인가’ 주제로 토론을 진행한 5,6조는 두개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 자기 재능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치물일 뿐이다. VS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로 분류할 수 있다.

모든 토론이 결론을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5,6조 역시 의미 있는 의견들이 다양하게 나왔습니다.

  • 친일예술은 정치적 도구로서 사용된 예술이다. 정치적 여과 없이 이용되고 교육에 바로 투영이 되었다.
  • 친일논란이 있는 예술을 모두 없애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 다만 ‘나쁜 예술’을 기억하고 교육용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 이러한 작품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중요하다. 이면적인 내용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 토론 주제를 바꾸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친일 예술,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 왜 사과해야 하나’라는 주제로 토론을 펼친 7,8조는

  • ‘협상’을 할 문제가 아닌데 협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안된다.
  • 여성문제와 전쟁범죄라는 것을 앞에 두고 일본에 압력을 가하고 국제여론을 만들어야 한다.
  • 하지만 우리도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사회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
  • 한국 사회 안에서도 인권과 여성에 대한 의식이 낮은데 이 부분도 함께 올려야 한다.
  • ‘위안부’라는 단어부터 바꿔야 한다. 역사는 정명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일본보다 도덕적 우위를 가지기 위해선 성노예뿐만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당했던 수난사를 알려야하고 우리부터 공부해야 한다.

라는 결론으로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결론을 낸 조로 뽑혀 100년 물병을 부상으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중국 등에 있는 항일유적, 어떻게 해야 하나’로 토론을 한 9,10,11조는

  • 남북협력을 통한 공동역사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 항일유적을 보존하고 발굴할 때 지속적인 관심과 재정지원이 필요하다.
  • IT기술을 접목하여 중국 등에 있는 항일 유적지를 안내하고 설명하는 어플 등을 개발해야 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종찬 위원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국과의 네트워크가 이제는 많이 노화되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관계를 지속하던 사람들은 모두 은퇴를 하고 새로운 인물들로 채워진 상황에서 하루 빨리 유적지와 사적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우리나라 영토 안에 존재하는 독립운동가 사적지 역시 찾아내야 한다는 의견을 주었습니다.

마지막 주제인 ‘우리말 속 일본말 써야하나 말아야하나’로 토론을 진행한 12,13,14조는

  • 남북언어를 통일하는 연구를 진행하자.
  • 어른들은 일본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이 일본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언어를 배우고 습득하는 과정인 초·중·고 교육과정부터 시작해야 한다.
  •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방송이다. 방송을 통해 노출되는 일본어들은 확산이 빠르고 영향력이 높다.
  • 쉬운 우리말 사전이 있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으니 홍보를 통해 알리고 학교에도 비치하자.
  • 말과 글 광복이 매우 급하다!

라는 결론으로 종합토론까지 마무리하였습니다.

시민위원310은 다른 조 토론을 경청하며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토론캠프가 마무리되고 시민위원310에 대한 위촉장 수여식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2018년 새롭게 시민위원310 활동에 신청해주시고 열심히 활동해주신 시민위원310 여러분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함께 준비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대시민 토론캠프를 가졌습니다.
시민위원310 행사 중 가장 큰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두가 광장에 나와 독립을 말했던 1919년 그날처럼 <시민토론캠프310 3·1운동은 토론이다>에 참석해주신 분들 모두는 그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눴으리라 믿습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술국치일’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과 함께 걷는 국치길 답사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백두산 넘어가자

남성중찬단 ‘라 클라쎄’의 압록강 행진곡, 고향으로 국치길 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통치권이 넘어간 경술국치일을 잊지 않기 위해 서울시는 2015년부터(광복70주년) ‘국치길’을 독립운동가 후손, 시민들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국치길 답사의 시작은 언제나 ‘통감관저터’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거꾸로 세운 동상’이 있습니다. 주한 공사이자 남작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받치고 있던 잔해를 발굴해 거꾸로 세운 것입니다.

평일 낮임에도 예상보다 많은 시민위원310이 함께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김구, 윤봉길, 이회영, 조소앙, 권기옥 등 독립운동가 후손도 함께 국치길을 걷기 위해 자리해주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자리에서김익상 의사 의거를 되새겨보고 ‘노기 신사 터’도 방문하였습니다.
노기 신사 터에는 수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신사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 곳에서 손을 씻고 입장했다고 합니다.

서울 한복판에 거대한 신사를 여럿 조성하였던 일제.
조선인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서였겠죠.
관광을 위해 쉽게 방문하는 ‘남산 계단’이 바로 조선신궁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384개의 층계를 오르며 그 당시 조선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조선신궁 건설계획에 따라 사라진 고종의 ‘한양공원’터도 방문하였습니다.
오래된 세월만큼 비석에는 6.25 전쟁때 생겨난 탄피자국도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함께 사진을 찍은 순간에는 마음이 뭉클하기도 하였습니다.

옛 남산식물원 자리가 바로 조선신궁터입니다.
시민위원310과 독립운동가 후손은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서 답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비가 나리는 날씨에도 이탈자 없이 함께 국치길을 걸어주었습니다.

걷고 또 걸으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으면
자연스레 길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2019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에도 우리는 똑같이 국치길을 걸을 것입니다.
반복해서 걸으며 길을 내고 땅을 다지며
이곳에서 우리 주권이 일제에 넘겨졌었던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걸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00년 학교 시리즈 강연 ② <대한민국 100년 이야기>

 

인간은 어느 순간 ‘나’의 시작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내 태몽에 대해 부모님에게 묻기도 하고 내 이름 뜻에 대해 알고 싶어 옥편을 뒤적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1~2살 때 사진을 찾아보며 기억이 나는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의 시작은 어떠했을까요?
대한민국이란 나라 이름은 누가 만들었고,
어떤 나라를 세우고자 했을까요?

7월 12일
100년 학교 두번째 강연 <대한민국 100년 이야기>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탄생을 보았습니다.
명확하고 분명해서 착각할 필요가 없는 <대한민국 100년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대한민국 100년 이야기> 강연은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13층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아마 서소문별관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일텐데 모든 시민위원310 위원들은 헷갈리지 않고 잘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강연 시작 전 작은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카카오톡에서 ‘삼일운동 100 대한민국 100’ (@서울시삼일운동) 친구등록을 해주신 분들에게 100년 물병을 드린 것입니다.

이 100년 물병은 가로 100mm 크기로 아기 젖병 소재로 제작되어 따뜻한 물을 담아도 안전하답니다.
앞으로 답사와 토론캠프 등에서 시민위원310 손에 100년 물병이 들려진 것을 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이날은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tbs 다큐멘터리 <대한민국 민주공화정 100년의 약속>을 함께 시청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민주공화정 100년의 약속>은 방송사 최초로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의 역사를 역사적 근거를 통해 밝힌 프로그램으로 지난 3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선정한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민주공화정 100년의 약속>은 100여 년 전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철저한 사상적 근거와 오랜 준비 끝에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게 되는 배경과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꿈 꾼 나라인 민주공화정 체제의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다소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다큐멘터리를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의 뿌리와 우리의 주권은 왕이 아닌 시민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갑자기 수립된 것이 아닌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다는 것이며
대한민국은 미국과 소련과 같은 열강들이 준 것이 아닌 우리가 쟁취한 나라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가 임정요인들에 의해 채택될 때 다른 나라에서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장면에서는
시민위원310 위원들은 곳곳에서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30분 간의 다큐멘터리 상영회가 끝나고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총감독과 <대한민국 민주공화정 100년의 약속>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김성진 감독, 더불어민주당의 진선미 국회의원이 민주공화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날 국회 원구성으로 바쁜 가운데도 민주공화정으로 탄생한 국회를 대표하여 진선미 의원이 참석해주었습니다.
국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는 제70주년 제헌절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터라 국회에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100주년을 위해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김성진 감독은 중국에 위치한 김신부로 22호 등을 다녀보고 우리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곳들은 모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섰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한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엔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로, 상해로, 미주로 떠나야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립군을 키우는 학교를 세우고 공군이 되어 비행연습을 하고 돈을 벌어 임시정부에 부쳤습니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의 선조, 선배들이 독립을 꿈꾸며 밟았던 그 땅들은 작은 표식 하나 품고 있을까요?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된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열흘만에 정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전부터 공화국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을 담고있는 것이 바로 1917년 대동단결선언입니다.
‘주권은 불멸하는 것이다.’라는 대목을 품고있는 이 선언 역시 임시헌장을 작성한 조소앙 선생이 이끌었습니다.
민주공화정은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차근차근 준비되고 설계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해성 총감독은 우리 임시헌장이 담고있는 고도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동시에 몇 차례나 개정되고 깁고 더해왔던 우리 헌법에서 바뀌지 않은 첫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대해 언급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민주공화정’
어려운 말입니다.
민주는 무엇이고 공화정은 무엇일까요?
쉽게 대답할 수 없지만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강연을 듣고나니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임시헌장이 담고있는 내용이 ‘유토피아’같아서 강연을 듣는 내내 행복했다고 합니다.
독립된 국가를 선포하고 사형과 신체형(고문, 태형 등)을 금지하였으며 공창제를 폐지하고 남녀 귀천, 빈부 계급 없이 모두 평등하다고 임시헌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100년 전 대한민국을 세운 선배들이 꿈꾼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질문해봐야 합니다.
우리의 민주공화정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말입니다.

서간도 시종기 낭독회 “서울을 떠나는 이회영과 6형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300여 명 미만.
여성독립운동가 수는 과연 이렇게 적었을까요?

삯바느질, 식모살이로 번 돈을 임정에 보내고,
옥바라지 골목에서 독립운동가 아들 면회를 위해 하루 종길 기다렸습니다.

품 속에 소총 자루들을 숨기고 눈 오는 만주 벌판을 걷기도 하였습니다.
여성에겐 감시의 눈초리가 덜 하다는 장점 아닌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손끝에 내내 달려있던 바늘, 행주치마,
총알 하나로 두 명의 적군을 위협하였던 사격실력,
추락 따윈 두려워하지 않으며 비행했던 결계는 지금 누가 기억하고 있을까요?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 묘역에서 참배를 마치고 서울YWCA 회관으로 모였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큰 비가 내렸습니다.
의미가 있는 빗줄기인 것 같아 묵묵히 걷고 참배를 드렸습니다.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총감독의 사회로 낭독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작년 <백범일지> 낭독회에 이어 올해는 <서간도 시종기>를 낭독합니다.
<서간도 시종기>는 우당 이회영의 아내, 영구 이은숙 선생이 오직 기억과 손끝에만 의존해 써내려간 육필 회고록입니다.

전 재산을 들고 서울을 떠나 50여 년 동안 겪은 독립운동의 시작과 끝을 집대성한 육필 회고록이지만
‘규방문학’ 또는 ‘독립운동가 아내의 수기’라는 식으로 가치평가가 유보되어 왔습니다.

첫 낭독회인 만큼 이은숙 선생의 후손인 이종찬 위원장 부부, 이종걸 의원 부부가 낭독자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첫 낭독자는 이종찬 위원장님의 부인인 윤장순 선생이었습니다. 시집올 때 즈음 읽어보았다는 <서간도 시종기>는 국한문 혼용으로 어려웠는데 지금은 한글판으로 이렇게 쉽게 읽으니 참으로 좋다는 소감을 내비치셨습니다.

또 소리내어 책을 읽은지 언제인가 더듬어보았더니 손주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준 것이 기억에 난다는 답을 주셨습니다.

‘낭독’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사람과 함께 읽는 것입니다. 한 책으로 두 명이 읽고 다섯 명이 읽고 열 명이 읽으니 얼마나 좋은 책읽기 방법인가요.

“만주를 오고 싶으면 미리 연락을 하고 와야지 생명이 위태치 않은 법인데, 하루는 조선서 신사 같은 분이 와서 여러 분께 인사를 다정히 한다. 수삭을 유하며 행동은 과히 수상치는 아니하나, 소개 없이 온 분이라 안심은 못했다.”

「서간도 시종기」에 언급된 만해 한용운 선생에 대한 내용입니다.
홀로 만주로 온 만해 선생은 하필이면 스파이로 오해받아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에게 총을 맞으셨다고 합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왔기에 스파이, 밀정으로 오해를 받은 것이죠.
이때 당한 부상으로 만해 선생은 평생 한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사셨어야 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이 채워지지 못할 뻔한 순간이었습니다.

“내 생명을 뺏으려 하던 분을 좀 보면 반갑겠다”라며 대인배같은 말로 자신의 괜찮음을 표현하였던 만해 선생은
이후 불교계를 대표하여 3·1운동을 이끄셨습니다.

우당과 6형제가 들고 간 재산이 요즘으로치면 얼마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낭독회에서 나왔습니다.
69년 기준 모 월간지 추산으로 600억 규모라는 보도가 나왔으니 지금으로선 상상도 가질 않는 재산규모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붙이기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런 집안의 형제들 대부분이 독립운동을 하다 굶어죽거나 병사하였습니다.

이은숙 선생은 이후 고국으로 몰래 다시 들어와 고무신 공장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 공장은 친일파 집안이 운영하는 공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번 돈을 다시 베이징으로 보내고 배고파 우는 아이들에게는 강냉이를 불려 주어야 했습니다.

하루는 공장에서 불량으로 생산된 짝짝이 고무신을 아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제대로 된 고무신을 사줄 수는 없으니 짝이라도 맞지 않는 고무신을 준 것입니다.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온 이은숙 여사는 그 고무신이 아까워 신지도 못하고 끌어안아 잠이 든 아들의 모습을 보며 한참을 우셨다고 합니다.

그 아들이 이종걸 의원의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이 대목에서 관객도 패널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누군가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수 없이 친일을 하였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국경을 건너고 모진 고초를 당하고 눈 속에서 산 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그 사람들은 무엇이 되나요.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모두 바보라서 편한 것, 좋은 것을 몰랐을까요.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그러한 존재를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고무신을 끌어안고 잠든 아들을 보았을 때 이은숙 선생의 심정은 어떠하였는지, 그 앞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라는 말로 변명을 할 수 있을지 묻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이날 「서간도 시종기」낭독회 참석자 중 가장 어린 참석자의 목소리로 낭독하기도 하였습니다. 젊은 목소리로 듣는 「서간도 시종기」의 울림이 참으로 크고 듣기 좋았습니다.

낭독회를 마치고 명동에 새로 생긴 ‘우당길’을 함께 걸어보았습니다. 우당길은 이회영 선생의 집터였던 중구 명동에 새롭게 조성된 길로 우당 형제들에 대한 소개와 업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조성된 곳입니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도 많은 시민위원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걸어주었습니다.

「서간도 시종기」낭독회는 앞으로 2번이 더 남았습니다. 작년에 이어 서울시가 낭독회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소리내어 읽음으로서 내가 김구가 되고 이은숙이 되어보자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낭독소리가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가 닿는다면 독립운동 관련 책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이 날은 서울을 떠나는 독립운동가 집안에 대해 읽었습니다. 다음 낭독회에서는 간도에서 살아가는 독립운동가 집안에 대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고 걸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시민위원310] 2018년 시민위원310 첫 모임-시민위원 참여후기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습니다.
처음 보아도 반가운 얼굴들이었습니다.

2018년 6월
시민위원310 첫 모임을 갖고 총 27명이 시민위원310 첫 모임 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중 함께 읽으면 좋을 네 개의 후기를 소개합니다.
찬찬히 읽어보며 그날의 두근거림을 다시 한번 만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위원310의 첫인상

김수연

시민위원310은 대학교 입학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주체적으로 신청하고 참여한 첫 대외활동이다. 생각보다 시민위원310에는 대학생보다 직장인, 어르신들이 많이 참여를 하셨다. 그 광경을 보고 학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민위원으로 활동한다는 의미가 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첫 모임이 시작이 되고 시민위원이 생각하는 3·1 운동의 의미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마다 3·1운동을 받아들이는 의미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공통적으로 그렇게 3·1운동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낸 것이 대단히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3·1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그 후에 이종찬님, 서해성님의 말씀들은 지루할 틈 없이 그분들의 말 속으로 나 자신을 빨려 들어가게 했다. 보통 내빈 소개, 연사 같은 것들을 할 때 말씀들이 너무 어렵고 흥미롭지 않아 집중하지 못하기 일쑤인데 이종찬님과 서해성님의 말씀들은 재밌고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귀에 쏙쏙 박히는 느낌이었다.

 

그 후에 김용만님이 시민위원이 해야 할 일을 소개시켜주었다. 바로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접었던 블로그를 다시 새로 시작하려고 한다. 이제 시민위원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으니 다음 활동부터는 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자랑스러운 시민위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왜 대학생보다 연령이 높은 사람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서울시에 대한 애정이 넘치고 여기서 듣는 강연이 너무 즐겁기 때문 아닐까. 나는 그들이 대단히 멋있게 느껴졌다. 나이가 들어서 자식들을 데리고 오면서 시민위원 활동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나이가 들어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애정을 계속적으로 가지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활동들을 많이 하고 싶다. 시민위원310 활동을 하면서 역사적 지식과 애국심이 마구마구 생겨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3·1운동은 통일정신이다

황원섭 시민위원

지난 6월 16일 오후 서울시청 본관 3층 회의실에서 개최했던 “3·1운동은 생일이다” 시민위원310 행사에 참석했었다. 그 동안 독립운동 관련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있어 내년 3·1절 10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기 위한 시민위원 활동에 관심을 많았지만, 안국역 독립운동 태마 역 행사이후 처음 참석했다.

 

주최 측의 섬세한 준비로 행사는 매끄럽고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이종찬 이사장이 환영사를 통하여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의 의미를 설명하고, 대한민국은 1919년에 세워졌다는 역사적 논리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여 소위 ‘건국절 논쟁’이 이젠 끝났다는 확신을 얻었다.

서해성 총감독이 김구선생 귀국 장면을 설명하면서, 당시 연도가 태극기 하나가 없었고 출영 나온 환영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얘기가 그 때의 정치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어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3·1운동은 생일이다”라는 시민위원들의 생각을 소개하는 동안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비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지난번 시민위원310 사무국에서 “3·1운동 □□이다”라는 주장을 공모할 때 참여하려 했었는데 잠깐 잊고 넘어가 아쉬운 생각이 들어, 지금이라도 내 생각을 피력하려고 한다. “3·1운동은 통일정신이다”라는 내용이다.

 

3·1운동의 역사적 이상을 여러 각도에서 비쳐볼 수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국제평화주의 추구, 한민족의 통일구현으로 이해하고 싶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상과 비전은 자주적 민족통일이라고 생각한다.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국내외 살던 2,000만 동포가 모두 참여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었다. 3·1운동을 모태로 수립한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회의와 한성정부를 통합한 정부였고, 좌우익 등 모든 이념을 아우르는 통일정부였다.

 

사실상 민주주의나 국제평화주의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지만 민족통일만은 아직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3·1운동이 지향해야 될 가장 중요한 비젼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라고 생각하여 “3·1운동은 통일정신이다.”라고 풀이하고 싶다.

 


3·1운동은 생일이다

 

시민위원 이재찬

 

지난 6.16일(토) 오후 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이번 행사는 ‘3.1운동은 대한민국의 생일임을 실감나게 하였다. 해가 바뀌면서 시민위원310의 참여와 역할은 빛을 발하고 있다. 개그우먼 조승희씨의 사회는 행사의 흥을 돋우고, 한국전통무용수 2인의 칼춤은 3·1운동의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인상을 주었다.

환영사에 나선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이종찬 위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어 매우 기쁘다.”고 하였다. 사실 한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된 기념관이 없었으며, 다만 독립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등이 있었다. 반면 중국에는 상해, 항조우, 충칭 등 9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들이 세워져 있다. 이를 보면서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한국보다 크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3·1운동은 ○○이다!’라는 주제로 시민위원 310이 제출한 수많은 100년 메시지들은 3·1운동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내년 100주년 행사를 앞두고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어서 서해성 총감독은 3·1운동은 대한민국 근대사의 저수지라고 강조하였다. 민족사의 저수지에는 동학, 조선, 대한제국, 왕, 기생, 혁명, 공화정, 민주, 인권, 여성, 어린이, 미래도 다 들어 있다. 이제는 3·1운동이라는 발원지로부터 물을 대면서 새 역사를 개척해 나아가고 있다. 3·1운동은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 건국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은 곧 대한민국 100주년이다.

3·1운동은 민족사의 거대한 생일이다. 2천년 이래로 우리 겨레는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 역사의 어떤 순간도 3·1운동 만큼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날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이 되었고, 장구한 봉건제는 민주공화제로 전환되었다. 왕토는 국토가 되었고, 백성은 시민, 국민이 되었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하였다. 지난 날 얼룩진 역사를 돌아보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께는 경의를 표하면서 더 이상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지 않도록 3.1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여 국민적 대동단결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다.

 

 


 

100년의 나라사랑을 되돌아본다

김기혁 시민위원

 

저는 이번 310 행사에서 3·1운동과 우리나라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시청에 도착해서 독립운동에 사용된 태극기를 바탕으로 만든 100년 배지를 받았습니다. 배지를 보며 타국에서 대한독립만세와 태극기가 담긴 깃발을 만들고 썼던 독립운동가를 생각하니 그 의미가 와닿았습니다.

사회자 조승희 님께서 조용하고 어색했던 분위기를 풀어주면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신칼무 공연에서 고운 한복과 전통 음악이 어우러져서 나오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참 좋았습니다.

처음에 ‘3·1운동은 생일이다’ 라는 제목을 보고 8·15 광복절이 생일이지 어떻게 3·1운동이 생일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종찬 위원장님의 환영사를 들으며 중국에는 5곳이나 있는 임시정부 기념관이 우리나라에는 1개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서해성 감독님은 3·1운동은 우리나라가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왕토에서 국토로, 백성에서 국민과 시민으로 바꿔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의 통치를 받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국가의 주권자로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된 것도 3·1운동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새롭게 보였습니다.

영상 ‘대한민국 100년의 탄생’을 보며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영상 ‘70년간의 비행’을 보며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에서 힘들게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으로 인해 조국으로 올 때의 감회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제에게 현상금과 수배령이 걸려서 도망다니고 나라없는 민족이라는 서러움을 당하며 외롭게 독립의 희망 하나만을 붙들고 수십 년 동안 활동하신 것을 생각하니 참 감사했습니다.

그 후손인 저도 그 분들을 기리기 위해 홍보 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테고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며 살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시민위원이 참여한 ‘3·1운동은 ○○○이다’를 발표하는 시간에서 각자가 생각한 3·1운동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비꽃다발’ 같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와서 신기하기도 했고 하나하나가 다 의미를 담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김용만 단장님께서 사업을 소개하고 정다정 팀장님이 SNS 홍보와 뱃지, 우리밀 선물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사단법인 사람숲에서 탑골공원, 운현궁, 서북학회터 같은 역사적인 자리에 100주년 기념공간을 만드는 일에 후원하면 후원자 이름을 새긴다고 하는데 솔깃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밀 씨앗과 화분, 흙을 선물로 받았는데 잘 키워서 싹을 내고 밀도 잘 거두면 좋겠습니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키우는 화분처럼 시민위원 310 활동도 꾸준히 참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추모하고 기념하도록 힘쓰겠습니다. 내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모습을 그리며 다음 번 모임이 기대되고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