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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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학교 시리즈 강연 ③ <신흥무관학교, 입교하는 날>


 

 

2018년 100년 학교 시리즈 마지막 강연을 위해 입장하는 시민위원310 발걸음이 아주 씩씩합니다.
그 어느때보다 신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강연 주제가 바로 <신흥무관학교, 입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이 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강연장에 들어선 것입니다.

 

‘신흥무관학교 입교식’은 역사학자 서중석 선생이 맡아주셨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이자 1세대 역사학자로 잘 알려져계십니다.
무엇보다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던 시절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2001, 역사비평사) 단행본을 발간하는 등 의미있는 연구와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신 분입니다.
이 날은 서중석 선생의 제자들도 100년 학교 강연을 청강하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위원장 역시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는 날이라 왔습니다!”라는 유쾌한 문장으로 소감을 밝혔습니다.
아마 아주 어릴때부터 신흥무관학교 입학생이 아니셨을까 싶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물었습니다.
“식민지 시절을 겪었던 다른 나라들도 외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을까요?”
나라를 잃은 순간 당연히 독립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만 사실 한국만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하며 식민시절 시작 직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한 나라는 많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해외활동을 빼놓고는 절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만주, 상하이, 연해주, 일본, 미국, 멕시코, 쿠바 등 독립운동 무대는 아주 넓고 광대했습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일제강점기 아래 한국은 한번도 기본적인 자유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근대의 기본권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고 이것은 일본패망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문자로 출간, 출력되는 모든 것을 게엄상태와 똑같이 검열받았습니다.
1920년대 문화통치 시절에도 한번도 검열받지 않은 문서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수 많은 신문사와 출판사가 압수당하고 종간을 강제로 선언해야했습니다.

3·1운동 이후 옥내 집회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으나 항상 감시대상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자유가 없었고 정치적 활동 역시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일제의 감시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운 땅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목표로 고향을 떠나 만주로, 상하이로, 미주로 간 것입니다.
어렵다고 포기한 것이 아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고 확장한 것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는 세워진 뒤 3·1운동까지 한번도 쉰 적이 없는 학교라고 합니다.
학교가 없어진 뒤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더욱 대단한 활동을 하며 활발히 명맥을 이어나갔습니다.

1910년 무단통치로 암울했던 시기 어째서 신흥무관학교는 이렇게 잘 싸울 수 있었을까요?
바로 지도층이 매우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이회영과 6형제를 비롯하여 이동녕, 이상설, 김동삼 등 아주 중요하고 탄탄한 초석이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진 간도 지방 주민들도 소작농 출신으로 고통을 잘 이겨내고 끈기가 아주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동질성이 강한 주민들은 신흥무관학교의 지속성을 더했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말하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돈이 많았습니다.”
사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 최고의 부자가 전 재산을 털어 세운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 ‘신흥강습소’에서는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출신 여럿이 교관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3·1운동에 대해서도 단순한 만세운동 차원이 절대 아니며 우리 민족사에서 광복절과 함께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라 정의하였습니다.

3·1운동 전 한국 모습은 어땠을까요?
1910년대 진행된 무단통치로 한국인은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무자비한 무단통치 아래 미래가 없고 인간으로서 긍지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염상섭의 <만세전>은 말 그대로 ‘만세 이전前’ 이라는 뜻입니다. 원 제목은 ‘묘지’라고 합니다.
3·1운동 직전 한국의 모습은 마치 묘지와 같았다는 말이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져있고 내일이라는 것을 모른 채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모든 말과 글을 검열받고 숨소리도 제대로 내기 어려운 시대상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있었습니다.
200만 국민이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르고 봉건에서 근대로 달려나갔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외치고 울부짖었던 ‘대한독립만세’로 한국인은 깨어나고 정말로 독립이 가능하겠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인간, 여성, 노동자, 농민, 백정 모두가 새롭게 인간으로 탄생하는 순간이 3·1운동이었습니다.

모든 강연이 끝나고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총감독과의 토론도 진행되었습니다.

서중석 선생은 역사학자로도 많은 연구를 하셨지만 민주화운동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겪고 동지도 잃었지만 덤덤하게 웃으며 당시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를 풀어나가셨습니다.
“그래도 독립운동보다 힘들지 않았다. 그런 위로를 친구들과 하며 견뎠다.”
선생의 깊은 말씀으로 강연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칼춤추고 말을달려 몸을단련코
새론지식 높은인격 정신을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새나라 새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두팔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떳다.

 

신흥무관학교 교가 3절부분입니다.
‘썩어지는 우리민족’.
식민지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유학생이 보았을 때 ‘묘지’이며 ‘썩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새나라를 세우고 우리도 인간이라는 자각을 끊임없이 하였으며 국내에서 해외에서 멈추지않고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날 시민위원310은 강연장을 나서며 신흥무관학교 학생으로 3·1운동 100주년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