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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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초판 발행일 기념과 백범일지 낭독회 - 시민위원 참여후기


 

 

백범 선생께서 머무셨던 새문 봉원사에 함께 하고는

 

 

김경운 시민위원

 

우리, 아니 내게도 신촌에서의 추억,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 불붙던 시절의 생각을 하며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그래도 아직은 안녕한 홍익문고
홍익서점에 눈인사하고 마냥 죽 때리던 복지 다방, 경의선 신촌역, 골목 주점 거리 올라 이대 정문 앞
나비소녀가 되어 버린 할머니께 간만에 인사드리고서는 낙엽이 되어버린 단풍과 은행잎을 밟고서 이대 후문 건너 봉원사길을 올랐다.

 

그때는 단숨에 올랐건만 주변이 너무도 심하게 변해서 산 위의 봉원사가 아니라
촘촘한 주택 위의 절집이 되어버렸다. 쫓기면서도 주유천하 하는 것 같았던
백범 선생께서 공덕리 박태병 진사의 동서인 유완무를 만나고 상객으로 대우받으며
고금의 역사를 담론 하며 한 달 여를 지냈는데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사용키 매우 어려우니
‘김구’라고 개명을 하고 다니기로 했단다. 외자 이름을 가진 문희, 황해 두 배우의 열렬한 어린 팬이었던 나는
백범 선생께서 김창수란 평범한 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올해 왠지 무척이나 불편했다.
이때에 이 인연을 갖게 된 새 절 태고종의 봉원사는 역사를 가진 고찰이면서도
내가 갖은 종교적 선입견보다는 무척이나 자유로운 곳인 듯싶다.

 

연꽃 문형이 있는 방석 위에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 백범 김구를 들려주시는
한시준 교수님의 말씀과 글 속에서 백범 선생께서는 세계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말과
글을 제시한 이상주의자이셨다”라고 알려주셨다.

 

이상주의자? 건장한 씨름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의 냉철한 기획자. 요즘 말로 “강한 남자”이신데
바로 내가 무언가 결정 못하던, 찾지 못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주 오래전 나라의 국부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라 알려주신 어른들 속에서

“내가 소원하는 나라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무언가 맞지 않았다.
배움이 워낙 짧았던 탓에 미처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삼일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100주년을 두해 앞둔 2017년 올해. 이제 잦아질 모임, 모임, 모임들.
그 모임들에서 내가 살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 무능한 약해 빠져 나라를 뺏겨버린 황제
혹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를 욕하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고 마는 역사를 배운 우리 세대.
그리고 남과 같아진 가족들에 3·1혁명을 이회영 선생님 가족을 알려주려 한다.
이제 99주년 삼일절에는 언제나 그러했던 종로 보신각 타종행사를 함께하고 태화관을 알려주고
태화로를 따라 독립선언서의 길과 대한제국의 길을 알려주려 마음먹는다.

 

처음에는 많이 부끄러웠다. 듣고만 오자, 알고만 오자 하면서도 돌아오는 길은 항상 숙제를 가져오고는 했다.
그 부담은 이제 나의 자산이 되어 나누어 줄 수 있어 매우 기쁘다고.
책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던 총감독님의 말씀에 부끄럼 없이 읽을 수 있었던,
들어주고 응원 보내주신 동료 시민위원 모두와 섬김으로 일러주고 보여준
“젊은 그들”에게 행복케 했던 맘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마 김경운 절 드립니다.

 


 

박중호 시민위원

 

우리 선대 어른들이 살아오셨던 과정과 백범 선생이 사셨던 쓰라린 고통을 겪으면서 살았던 세월이었다.
요즘 우리들처럼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생각한 넓은 마음으로 사신 것이 큰 어른이시다.
백범의 정신을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 가슴에 세기며 살아야겠다.
지금은 제2의 독립이 필요한 시기이다. 우리 국민 개개인의 독립 말이다.

 


 

이재찬 시민위원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17.11.15. 수요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많은 시민위원들과 사찰 스님이 참석한 가운데 백범일지 초판 발행일 기념과 백범일지 낭독회 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는 서해성 총감독의 사회로 단국대 한시준 사학과 교수의 강연에 이어 백범일지 낭독으로 진행되었다.

  1.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 백범 김구

한시준 교수는 이날 강연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은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 임을 역사적 사실(史實)에 입각하여 역설하였다. 동아시아의 한·중·일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을 살펴보면 중국은 공자 외에 진시황, 손문, 장개석, 모택동 등이며,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은 세종대왕, 이황, 이이, 신사임당, 이순신 장군 등을 거명한다. 그런데 ‘한국인으로 세계에 알려진 인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나라로서 그 위상이 달라진 만큼 우리의 역사를 세계에 알려야 할 시대적 필요성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 속에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한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고, 인류에 공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평등·행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19C ~ 20C에 세계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투쟁을 전개하였던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세계 전 민족의 약 80%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독립운동이란 우선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고, 다음 인간의 자유·평등·행복을 지키기 위함이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치민, 프랑스의 드골, 필리핀의 호세 리잘, 이집트의 아라비 파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자국민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통한(痛恨)의 독립운동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세계적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을 찾는다면 누구인가? 국내외적으로 가장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인물은 백범 김구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중국, 대만을 비롯,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중국과 대만에는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처럼 부각되어 있다. 중국 국민당과의 한중 대일 공동 항전의 지도자로 이해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지난해 중국의 대일 항전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김구의 행적을 다큐 제작과 2회에 걸쳐 방송을 하였다. 중국은 역사다큐를 제작하는 데 있어 중앙정부의 영향이 크게 미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인식이 한국보다 크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된 기념관이 없지만(독립기념관, 백범 김구 기념관 등이 있다), 중국 상해, 항조우, 충칭 등 9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들이 세워져 있다. 또한 임시정부를 이해하는 차원이 다르다. 중국 정부나 중국인들은 상해의 임시정부 청사를 대한민국의 탄생지로 여기고 있고, 한국에서도 그렇게 여기는 줄로 알고 있다. 임시정부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김구를 이해하는 차원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김구를 ‘독립운동 원훈(元勳)’, 또는 ‘한국 국부(韓國國父)’라고 일컫기도 한다. 김구는 이미 중국에 널리 알려져 있고,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가 영어·중국어·일본어·독일어·러시아어·몽골어 등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것은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구는 자주독립 외에 세계평화를 궁극적으로 지향하였다. ‘나의 소원’에서 밝힌 그의 목표는 ‘자주독립국가’, ‘자유국가’, ‘문화국가’ 건설이었다. 김구는 세계평화에 대한 꿈과 실현방안을 제시한 지도자였다. 일제를 상대로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주의 입장에서 보면 무모하고 어리석다 할 것이다. 김구도 이를 모르진 않았다. 그렇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바위는 부서졌다. 김구가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세계평화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민족도 해본 일이 없으니 공상이라 하겠지만, 우리 민족이 나서서 해보자”라고 하였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상가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세계평화를 목표로 삼고, 그 방안을 제시한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1. 백범일지 낭독

김구 선생(법명 원종)과 봉원사와의 인연을 보면, 1899년 일본 장교 살해사건으로 투옥 중 탈옥하고서 서울 서문 밖 새절(지금 봉원사)에 피신했으며 사형(師兄) 혜정(慧定) 스님과 동행해서 평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해우했다. 그 후1948년 봉원사를 다시 방문하였다. 인연이 깊은 봉원사에서 백범일지 초판 발행일을 기념하는 낭독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1928년부터 쓰기 시작한 ‘백범일지’는 일제 침략이 심해지고, 독립의 희망이 점차 약해지면서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 형식으로 집필한 것이다.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담아냈는데 상권과 하권, ‘나의 소원’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1929년, 아들들에게 편지로 전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구한말 당시의 과거사로 ‘우리 집과 내 어린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은 그의 독립운동 기록으로 ‘3.1 운동의 상해’, ‘기적 장강 만리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 ‘정치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은 상하이 임시 정부 청사에서, 하권은 1942년에 충칭 시에서 각각 쓰였고 상, 하권과 ‘나의 소원’을 합친 판본이 1947년 12월 15일에 국사원(國士院)에서 출간되었다. 현재 백범기념관에서 소장 중이다. ‘백범일지’는 1997년 6월 12일,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다.

 

 

[백범일지 개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가난과 양반들의 횡포를 경험했기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대적 교육사업과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그의 나이 38세에 한일합방으로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 자를 구(九)로 바꾸고, 백정, 범부들(평범한 사람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백범(白凡)이라는 호를 썼다. 3·1운동 후에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원하였고, 광복군 창설 등 항일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에 돌아온 그는 남북 분단을 우려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힘쓰다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경교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효과적인 투쟁의 방법으로 불가피하게 폭력의 수단을 동원한 것일 뿐이며, 오히려 참으로 진실된 인간적인 사랑과 자비를 몸소 실천하였다. 해방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일과 정치꾼들의 음모에 의해 운명하여 장례행렬에 백만 인파가 따랐던 사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것을 보면, 선생은 진정 이 나라의 영원한 지도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