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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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답사 세 번째 길 -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 시민위원 후기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에서 아관파천의 장소인 옛 러시아 공사관까지
시민위원310 여러분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 같지만 백년 남짓한 시간 안에 일어난 일들.
먼 곳 같지만 출퇴근길 항상 걸어다니던 곳.
그 길을 함께 걸어주시고 후기를 보내주신 모든 시민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억해야 할 공간

 

최다연 시민위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가을 향기 그득한 주말 오후였다.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장소들, 아무 생각 없이 거닐었던
그 공간들의 의미를 새기며 걸었던 날이었다.

답사 내내 김춘수의 「꽃」이 떠올랐다.

연인들에게는 데이트 코스, 또 어떤 이에게는 출근길이었을 그 길,
수많은 길 중 그저 하나의 길일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걷고 의미를 새긴 후 그 길이 살아나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기억해야 할 공간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시작과 끝. 그 길을 시민위원과 함께 걸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과 덕수궁, 알수록 아픈 이름 중명전, 손탁호텔과 고종황제의
아관파천 장소인 구 러시아 공사관까지 안타깝고 아픈 그 공간을 함께 걸었다.

그중에서 환구단과 중명전은 유난히 아팠다.

 

 

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선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 지내는 종묘,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과 함께 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거행하던
중요한 장소였다. 하지만 조선은 황제만이 천자로서 천제(天祭)를 올릴 수 있다는
명의 외압으로 인해 세조 이후 이를 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고종이 황위에 오르고 근대적 자주 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이곳 환구단에서 하늘에 이를 고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제는 반드시 이것을
없애야만 했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환구단이 헐리고 호텔이 들어섰고
지금은 황궁우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호텔에 딸린 정원쯤으로 보일 지경이니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거듭 중 重, 밝을 명 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의 중명전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름과는 다르게 시련의 근대사를 간직한 현장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장소이며 화재로 인해
크게 훼손되었고 최근까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수시로 변경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길을 아이와 꼭 함께 걷고 싶었다.
500년을 이어오던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이 되고 그 시작과 끝이 녹아있는 그 길을
아이가 아직은 어리지만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가 다치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하고 엄마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너무도 안타깝고 수치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애써 외면하며 자세하게 알려 하지 않았고
거부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공부하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아가고 공부해야 우리의 역사를 마주할 자신이
생기고 그래야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공간을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시민위원들과 함께 했던 강연과 답사들이 시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다뤄지고 학생들의 교육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방법을
다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게 말이다.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 – 훼손된 얼룩진 역사의 재인식 필요

환구단 – 덕수궁 – 중명전 – 손탁호텔 – 구 러시아 공사관을 찾아가다

 

이재찬 시민위원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17.10.21. 토요일 조선호텔 앞 환구단(圜丘壇) 터에서
많은 시민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행사를 가졌다.
코스는 환구단 – 덕수궁 – 중명전 – 손탁호텔 – 구 러시아 공사관순으로
해설은 여느 때와 같이 서해성 총감독이 맡았다.

 

첫 번째 유적인 환구단은 사적 제 157호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제천의식의 명분론과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기우제의 필요성으로 원단의 설치와 폐지가 거듭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3년(1394)과 세종 원년(1419)에 일시적으로
원단제를 시행하였으며,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었으나 세조 10년(1464)에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은 원구단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반면, 우리는 독립성을
나타내기 위해 환구단이라고 부른다.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한 단지이다. 남별궁은 역대 왕의 명·청나라의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였다.
1899년 단지 내에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축조하고
태조의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다.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그 이후 일제는 1913년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없애기 위해
환구단을 헐고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세운 것이다.

 

 

 

둘째, 덕수궁(德壽宮)은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훼손되었다.
일제는 우리를 지배하면서 궁궐이 지니고 있는 국권과 주체성을 파괴한 것이다.
1910년 당시의 덕수궁 평면도를 보면 덕수궁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선원전터를 헐고 경기여고(전 경성제일여고)를, 길 건너 제사 준비소터에는
덕수초등학교를 각각 건립했다.
지금의 성공회성당이 들어선 정동 3번지 일대에 있던 귀족 자제들의 교육시설인
수학원(修學院)을 헐고 경성방송국을 짓기도 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일제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으로 신변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1907년
물러나기까지 사용하였다. 당시 일제는 1880년대에 경운궁터의 일부를 서구 열강(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공사관 부지로 떼어주었다. 광무 11년(1907) 8월,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로 물러앉았다. 이때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 정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의 궁호를 따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한문은 지금은 덕수궁의 정문이지만 원래 경운궁의 동문(東門)으로 대안문(大安門)이라 불렸다.
경운궁의 정문은 중화전과 중화문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 위치는 현재 서울시청사 별관 건물 자리이다.
덕수궁의 돌담길 또한 원래는 덕수궁 영역의 일부이다. 1922년 일제가 덕수궁 서쪽에 있던
선원전(璿源殿)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면서 생긴 길이다. 이로써 동문인 대안문은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자연히 정문의 구실을 떠맡게 되고,
인화문은 정문의 기능을 잃으면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1906년에 ‘대안’이라는 이름이 불안하니 나라의 평안을 위해 ‘대한’으로 바꾸자는
풍수상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대한문은 1914년 태평로가 생길 때와
1968년 도시계획으로 인해 본래 위치에서 뒤로 밀려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현재 지상에는 대한문을 오르던 기단 양옆 계단의 소맷돌과 조각된 서수가 남아 있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대한문의 현판은 당시 한성부 판윤을 지낸 남정철의 글씨다.

 

 

 

셋째, 사적 제124호인 중명전(重明殿)은 정동극장을 끼고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다보면
막다른 곳에 위치한다. 중명전은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1897년 경운궁의 확장과 함께
궁궐로 편입되었는데,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 의해 황실도서관 용도로 지어진
러시아식 2층 벽돌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과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중명전의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며, 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비운(悲運)의 장소다.
한일합방 뒤에는 외국인의 사교모임인 ‘경성구락부’로 쓰였다.
지금의 모습은 1925년 화재 후 벽채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넷째, 손탁호텔은 1902년 정동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 경영의 효시이다.
손탁(Sontag, A. 孫澤, 1854∼1925)은 1885년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 K. 韋貝)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손탁은 웨베르 공사 부인의 언니(처형)로
독일국적을 갖고 있었고 많은 외국어에 능통하여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대군주(고종) 및 명성황후와 친밀하게 되었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親露拒淸)정책을 수립,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공로로 조선정부는 1895년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하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한국 최초의 배일정치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친미파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발족되었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토역(復讐討逆: 복수를 위해 역적토벌), 친일내각 타도,
경복궁에 갇혀있던 고종 구출 등을 정치적 투쟁목표로 표방하고 정동소재 손탁 사저에 모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손탁 사저는 친러반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가 되었다. 1898년 고종황제는 한국독립을 위한
손탁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구 한옥을 헐고 양관(방 다섯 개)을 지어서 하사하였다.
이 때 손탁은 실내장식을 서구풍으로 꾸며서 손탁빈관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외국 귀빈들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고 숙박시킬 영빈관이 필요하여
1902년 구 양관을 헐고 2층 양관을 신축, 손탁으로 하여금 이를 경영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호텔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이용하였고, 아래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주방,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1909년 손탁이 귀국한 뒤, 1917년 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손탁호텔을 구입,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년 건물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하였지만, 1975년 소실되어 현재는 정동교회 뒤쪽에 공터로 남아 있다.

 

 

다섯째, 구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의 설계는 중명전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며,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다.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모양의 2연창(連窓)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현재는 탑부만 남아 있는데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덕수궁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로서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하여 있던 곳인데, 파천중 친일 김홍집(金弘集)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徐載弼) 주재의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등
다난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지금은 6·25전쟁 때 건물은 파괴되고 탑 부분과 지하 2층이 남아 있었는데, 1973년 현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1977년 사적 제253호로 지정하였다.

 

 

이날 행사를 통해 “나라의 힘이 약하면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된다. 이로 인해국가의 정통성은
물론 유적과 유물이 훼손되는 얼룩지고 왜곡된 역사를 안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통감하게 된다. 국가의 힘이란 통치자와 지도층, 그리고 국민 모두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줄 때
나오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해서는 공멸할 수 밖에 없다.
훼손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노력과 역사교육이 수반될 때
우리의 미래는 유비무환이 될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봐야하는지 ‘제국의 길’에서 배우다.

 

최용수 시민위원

 

 

유구한 반 만 년 우리 역사 중 ‘제국(帝國)의 시대(時代)’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거기엔 어쩜 당연한 까닭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동길을 걸으며 제국의 슬픈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종이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제를 올리며 황제에 즉위한 1897년 10월부터
환구단(圜丘壇)에서 국치일인 1910년 8월 29일까지
제국의 역사 13년을 환구단, 덕수궁, 중명전, 손탁호텔, 구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 상기해 보았다.

 

 

첫 방문지 환구단((圜丘壇, 사적 제157호)은 역대 왕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 배원친명(排元親明) 정책으로 중단되었다가 본격적인 제사는 1897년 환구단을 건립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때이다.
그러나 일제는 1913년 대한제국 정통성의 상징인 환구단을 철거하고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짓는다.
현재는 신위를 봉안하던 팔각의 황궁우(皇穹宇, 환구단 부속건물)와 황제의 상징인 용 문양을 새긴 계단뿐이다.
고종 황제의 즉위식과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환구단의 유물이
한 호텔의 정원 장식용으로 남아 있는 모습에서 일제의 계략을 느낄 수 있었다.

 

 

경운궁(慶運宮,덕수궁)은 본래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으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몽진(긴급피난)하였다가 돌아온 선조가 임시 기거하면서 임시별궁으로 삼았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왕궁으로 사용하다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시 경운궁이 있는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 주 무대였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이곳에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연호(年號)는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한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출범과 더불어 격동기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운궁의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중명전(重眀殿)은 1897년 고종이 경운궁 확장 공사를 하면서 궁궐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1899년 황실도서관(Imperial Library) 용도로 준공된 것이다.
1905년 11월 불법적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치욕의 장소이며,
1907년 4월 20일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이상설 등 3인의 특사를
헤이그로 파견하던 곳이다. 일제 때인 1912년부터는 외국인 사교클럽으로,
해방 후에는 서울클럽으로 사용되던 것을 2006년 문화재청이 인수하여 복원공사를 마치고,
현재는 대한제국의 역사교육장이 되어 있다.
을사늑약 체결 등 전시물은 힘없는 나라의 비참함을 말해주는 듯 했다.

 

 

이어 답사단은 독일 여성 손탁(Sontag, 孫鐸)이 건립한 최초의 서양식 호텔 인
‘손탁호텔(Sontag, 孫鐸)’ 자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수많은 제국의 비화와 독립을 위해 노력한 외국인 헐버트와 베델의 주요 무대였고,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伊藤博文)가 머물며 ‘을사늑약’을 압박했던 공작 장소이기도 했다.
비운의 역사를 이어가기에는 부끄러운 듯 호텔 터 표석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국이 길의 마지막 답사 코스는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정동 예원학교 옆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니 언덕 위에 이국풍의 우뚝 선 흰색 탑이 눈에 들어온다.
르네상스풍의 옛 러시아(아라사) 공사관의 탑이다.
일본을 견제하려는 고종은 세자(순종)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이듬해 2월까지 머물렀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러시아 공사관, 탑 외에는 빈터만이 남아 있다.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고종, 타국의 공사관에 피신하여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답사한 ‘대한제국의 길’이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버린다면 식민지배가 당연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서해성 총감독의 이야기는 어떻게 역사를 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준 뜻깊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