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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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호 탄생!
19.04.11 상해임정수립.. 대한민국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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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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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답사 첫번째 길 - '독립선언서의 길' – 참여후기


7월 15일 진행된 100년 답사 첫번째 길 – ‘독립선언서의 길’에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비시민위원분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편과 메일로 참여후기도 보내주셨습니다. 새롭게 독립선언서를 읽은 마음으로 적어내려갔을 후기 중 네분의 글을 소개하려 합니다.
더불어 우편과 메일로 참여후기를 보내주신 모든 시민분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은죽(銀竹) 같은 폭우 뚫고 선언서(宣言書)의 길을 내다.

최용수 시민님

 

“3·1운동을 걷습니다/ 3·1운동,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로 걷습니다/ 100년을 향하여/ 우리가 걸어서 3·1독립 ‘선언서의 길’을 내고자 합니다/ 처음으로 선언서를 따라서 걷습니다” ‘시민위원310’ 100년 답사 첫 번째 길, 3·1독립 ‘선언서의 길’ 스토리이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지난 토요일 오후 종로구 수송공원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1919년 ‘선언서(宣言書)’가 어떻게 작성, 인쇄, 운반, 낭독되어 전국적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는지,
‘그날’의 이동 경로를 답사하는 ‘선언서의 길’ 행사였다. 오는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서울시는 3·1운동의 정신이 우리들의 삶과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가 될 수 있도록 시민들과 함께 하는 ‘3·1운동 100년, 대한민국 100년’ 행사를 기획했다. ‘선언서의 길’ 행사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은죽(銀竹)처럼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서도 ‘시민위원310’ 50여 명이 종로구 수송공원에 모였다.
‘시민위원310’ 100년 답사 첫 번째 길, 3·1독립 ‘선언서의 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답사행사는 3·1운동 100주년 서울기념사업 총감독 서해성 교수의 리드로 15:00시부터 2시간여 동안 ‘보성사 터~태화관 옛터~탑골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첫 번째 장소는 조계사 후문 골목 건너편 수송공원에 있는 ‘보성사 터’이다. 공원 규모는 작았지만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로 바라보면 이렇게 넉넉한 공원도 드물다. 보성사(普成社)는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였단다.
보성사의 소유주 손병희(천도교 교주)의 특명으로 최남선이 초안을 쓰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선언서’를 넘겨받은 보성사 사장(이종일)은 1919년 2월 27일 밤 35,000매를 인쇄한다. 운반 중 일본 측 형사에게 발각되는 위기도 있었으나 족보라 위장하여 위기를 넘긴다. 또 3월 1일에는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 부도 발행한다. 이에 일경(日警)은 보성사를 폐쇄하고, 급기야 6월 28일 밤 불을 질러 태워버린다. 보성사의 터에는 6.35m 높이의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라는 조형물만이 남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태극문양의 형태를 취하여 민족의 얼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보성사 외에도 수송공원에는 독립운동을 대내·외에 알린 ‘대한매일신보’ 터,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교 터‘, 독립선언 기념비, 근대교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중동학교와 숙명여학교‘ 등 7개 학교의 터와 보성사 사장 이정일 선생 동상이 있다. 답사단은 폭우 속에서도 이정일 동상 앞에서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답사단의 다음 코스는 인사동의 ‘태화관 옛터’이다.
3월 1일 오후 2시, 한용운이 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민족대표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던 곳이다. 최초 선언장소로 계획했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긴 것은 흥분한 학생·시민과 일경의 충돌을 우려한 재경 민족대표들의 결정 때문이란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 원칙을 세운 독립운동, 그런데도 7,500명 사망, 부상자 1만5800명, 구속자 4만6300여 명 등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태화관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있다. 입구에 ‘삼일독립운동유적지’라는 표석이 있고, 1층 로비 벽면에는 ‘민족대표 삼일운동 선언도’가 걸려있다. 답사단은 선언도 아래에 둘러앉아 잠시나마 그날의 민족대표가 되어보았다.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종로2가 탑골(파고다)공원이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하던 바로 그 시각(3월 1일 오후 2시), 경신고 학생 정재용이 공원 중앙의 팔각정에 오른다.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쳐 들고 공원에 모인 5,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한다. 그리고 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3·1독립선언서‘의 원 제목은 그냥 ‘선언서’였지만, 정재용은 ‘조선독립’이란 4글자를 앞에 붙여 “조선독립선언서”라며 낭독했다.
이때부터 ‘3·1독립선언서(문)’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이후 3·1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총 1,542회 220만 명의 시위 참가라는 세계 혁명사의 큰 기록을 남긴다.

 

이번 행사는 (예비) 시민위원310의 ‘100년 답사’ 첫 번째 행사였다.
다가오는 대한민국 100년을 향하여, 3·1운동 당시 ‘선언서’가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을 100년 만에 시민들이 처음으로 걸었다. 은죽(銀竹) 같은 장맛비 속에서도 답사를 강행한 것은 시민들이 직접 걸어서 잊힌 3·1독립 ‘선언서(宣言書)의 길’을 되찾고자 함이다. 앞으로 서울시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까지 ‘C-47기 활용한 독립운동교육 프로그램 운영,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재현, 안국역 항일 독립운동 테마역사로의 재탄생, 100주년 기념 대표거리 조성, 서울시민 독립군 학교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다. 그러나 숭고한 3·1운동의 의미를 오롯이 되찾는 일은 시민들의 몫이다.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위원310’ 100년 답사 첫 번째 길, 3·1독립 ‘선언서의 길’, 비록 짧은 100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이었지만 1919년 3월 그날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재찬 시민님

 

지난 7/15(토) 오후 3시경 소나기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종로구 수송공원(조계사 뒤편)에서 열린 3·1독립운동 역사현장 탐방에 예비시민위원들과 더불어 참석하였다. 이날 진행을 맡은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기념사업 총감독은 보성사터, 태화관 옛터, 탑골공원 순으로 이동하면서 독립선언문 작성과 인쇄, 배포, 선언문 낭독,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교과서에서 알고 있었던 지식에서 나아가 당시의 긴박하고 아슬아슬한 일련의 사건들을 실감 나게 해설하여 당시의 상황을 깊이 있게 학습하는 기회가 되었다.

 

첫 장소 보성사(普成社)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27일 이종일(李鍾一)사장의 지휘 아래 극비리에 인쇄를 진행 중 친일계 형사 신승희(申勝熙)가 현장을 목격하였으나 손병희 선생의 간곡한 설득으로 위기를 넘겨 총 21,000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손수레에 싣고 이동 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다행스럽게도 들키지 않아 28일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둘째, 태화관(泰和館)은 당시 요릿집(명월관 분점)으로 민족대표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로 사전에 정해져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어서 불참)이 3.1 당일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경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일본 경찰에 의연하게 연행되었다.

 

셋째,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식이 이뤄지고 곧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면서 민족독립의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로써 탑골공원은 민족해방운동의 발상지가 된 것이다. 공원 내에는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동상, 한용운 기념비 등이 있다.

 

아울러 대한독립 만세기가 당시 태극기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3·1운동은 역사적 측면에서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 건국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하였다. 한 국가의 미래는 이를 지킬 힘이 있을 때 유지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강대국의 침탈을 받게 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3.1 독립운동 역사현장 탐방행사는 일제 치하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얼을 기리고 역사의 교훈을 실감하는 값진 현장 학습이었다.

 


 

그곳에 우리가 있었네

 

김경운 시민님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묘한 매력을 느껴진다. 이번에는 무엇이 차려져 있을까? 어떤 배움과 의문을 내게 가져갈 수있 을까. 불규칙한 날씨에 소풍가는 전날에 소사아저씨에 꿈이 꺾여 하늘로 오르지 못한 그이의 저주로 꼭 비가 내려 소풍의 설레임에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어린 시절의 국민학생 같았다. 서울서 나고 자랐으며, 살고있는 서울 깍쟁이인 나도 그곳에 공원이 어마어마한 내력을 가진 곳을 알지 못했다. 일주일에도 몇 번을 지나는 종로구청 바로 옆 조계사를 들렸다 가도 스페셜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있는 목은 이색 선생님의 뜻이 깃들었을 목은관을 다니면서도 그곳의 공원을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비가 오락가락 불편한 날씨에도 다양한 층의 예비시민의원들께서 모였고 다시 배우고 생각케하는 모임에 다시 알게 되는 역사, 교양에 무척이도 열성적이시다. 우산을 받치고 우비 안으로 쏟아 붓는 여름비를 느끼면서 총감독님의 해박한 우리 선열들, 그곳 스며있는 의미들에 귀는 쫑끗, 눈은 초롱초롱이다. 종로 한복판 자그마한 이공간이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인쇄소 문화와 숙명, 중동, 나중에 경희대까지 신교육의 발생지이고 3·1독립운동의 터전임을 듣고는 밟고 있는 땅에 죄송함도 느낀다.“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잊고 있어서 미안합니다.”라고

 

회화나무와 백송이 있는 조계사 경내를 지나 33인이 모여서 삼일독립선언문을 발표한 태화관. 애써서 준비해주신 차로 목을 축이며 대형 그림(태화관 33인의 낭독 모습)에 대해 듣고는 ‘찍자. 남는 것은 사진뿐이야’.

 

신나게 즐기는 “독립선언서의 길” 남인사마당 앞으로 해서 탑골 공원의 뒷문을 통해 들어갔다. “원래 꾼들은 뒷문으로 숨어든다고”그런데 그 시대 어찌 알고 “터지자 밀물같이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나왔을까 하는 의문에. 수송공원에 우뚝 서계시던 옥파 이종일 선생에 대해 들려주시며 삼일운동선언문이 한글로 인쇄되어 바로, 그리고 쉽게 누구에게든 이해와 전달되었다고 알려주신다. 이제까지 당연히 알고 있었던 삼일운동선언문 낭독의 기억들을 깡그리 뒤집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관순누나와 33인만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실을…

 

내리붓는 빗속의 수송공원에서 우산과 우의로 덮어쓰고는 공책에 메모를 하는 조금은 오래된 분들의 행렬이 여행 온 외국인들과 토요일 서울 시내를 즐기는 젊은이들에는 색달라 보이는지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지나버린 세월, 굳센 신념으로 우리나라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신 순국선열과 지사분들. 이름도 없이 쓰러져간 어른들게 감사하는 길은 “그분들을 기억해주는 것”이라던 말씀. 나라를, 후손들의 “아름다운 나라”를 위해 아직도 하늘위에서 내려다 보실 분들께 잠시라도 감사인사를 드릴 수 있었던 비 오는 날의“독립선언서의길” 답사였다.

 


 

권미영 시민님

 

7월 15일 오후 독립선언서의 길 답사 집결 장소인 수송공원에는 세찬 장대비가 내렸다. 빗소리 때문에 서해성 총감독님 목소리가 들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애써 귀 기울여 들으면서 보성사 옛터에 담긴 생생한 일화들을 마음속에 담을 수 있었다. 태화관(현 태화빌딩)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차츰 잦아든 비 덕분에 이후에는 선명하게 들리는 이야기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역사 속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변절자이자 희생자이며 3·1운동이 가능하도록 독립선언서를 눈감아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철, 태화관에 모인 33인의 대표 손병희 선생을 옥바라지한 주옥경 여사, 탑골공원에 모인 애국시민과 학생들을 대표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전도사. 이 세 분의 이야기는 3·1운동이 기적과 같은 우연과 숨은 영웅들의 노력으로 탄생한 귀중한 결과물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렇듯 3·1운동은 독립을 열망하는 수많은 시민의 애국심이 모이고 모여서 전국적으로 200만 이상의 국민이 함께 한 독립 혁명이 되었으며, 자유 대한민국의 첫걸음이 된 것이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탑골공원에서 이 선언을 마주한 사람들이 오열했을 당시의 모습이 그려지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미 독립된 나라에 태어나 자라오면서 독립국, 자주민임을 당연하게 느껴왔기 때문에 독립 선언이 주는 감동을 알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날 탑골공원 팔각정 위에 서서 다시 듣는 독립선언은 1919년 3월 1일의 애국시민 중 한 사람이 되어버린 나에게 뜨거운 감격과 가슴 저릿한 슬픔을 안겨주었다. 100년 답사 첫 번째 길에서 그렇게 3·1운동과 만났다.